제드 바틀렛 대통령은 취임 후 33개월 만에 자신의 첫 거부권을 행사한다. 거부권 대상은 공화당이 제출한 '상속세 폐지안'. 바틀렛 정부는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에게 상속세를 매기려고 했으나 공화당은 상속세를 '사망세·자녀재산탈취세'로 규정하고 폐지를 시도한다.

임기 반환점을 훌쩍 지난 바틀렛 정부는 국정 동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재선을 노리는 바틀렛에게 감세 정책 반대는 부담스런 소재였다. 반대로 공화당은 무엇을 하든 유리한 위치였다. 정국을 반전시킬 카드를 고민하던 백악관 참모들은 거부권을 꺼내들며 야당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Do you think I am weak(내가 약한 것 같나)"

공화당의 실력 행사에 '힘의 논리로' 반격하겠다는 이 발언은 거부권 행사가 최고 수준의 권력투쟁임을 보여준다. 행정권력과 의회권력 간 다툼이 '거부권 국면'으로 확대될 경우,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가려져야 양 측의 '제로섬 게임'이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새누리당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 투표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표결 진행되고 있다. 2015.7.6/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도 바틀렛 대통령의 그것과 닮았다. 국회법 개정안이 행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고, 협상을 주도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 당사자로 지목한 점 모두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승패 역시 명확했다.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관철시켰고, 유 원내대표를 사퇴시켜 자신의 '강함'을 증명했다.

한 친박계 의원은 "유 원내대표가 지난 4월 국회연설에서 정책 변화를 얘기하며 대통령을 면박주고 김무성 대표 역시 전당대회 승리 후 당직자를 비박계로 채웠다"며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런 당에 질질 끌려가며 나를 흔드는 사람들 위에 있어야 하나 생각들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거부권 행사가 권력투쟁과 맞닿아 있다는 설명이다.

반대로 두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두 정권이 갈등을 풀어내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바틀렛 정부는 공화당이 거부권 무효화 투표를 시도하자 공화당에 기운 4인의 민주당 의원을 찾는다. 이들이 대가를 요구하자 참모들은 6표를 쥐고 있는 공화당 의원에게 동일한 조건을 제시해 성사시킨다. 소통의 끈을 놓지 않은 게 승리 요인이었다.

반면 박 대통령에게선 대화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막식서 정의화 국회의장·여야 대표 외면, 5개국 국회의장단과 오찬서 정의화 의장 제외,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당정협의 거부 등 엉키고 설킨 정국을 풀어낼 단초인 소통에 나서지 않았다.

이미지 크게보기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 새누리당은 이날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유 원내대표의 '사퇴 권고 결의안' 채택을 위한 의원총회를 8일 오전 9시에 소집키로 했다. 2015.7.7/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거부권을 작동시킨 명분의 수준도 차이 난다. 바틀렛 대통령은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이라는 기조 아래 상속세 폐지를 거부한다. '가치의 충돌'이 거부권 행사의 주원인이었다는 것. 바틀렛의 첫 거부권은 이후 감세·증세 논란과 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으로 번지며 국가의 역할을 논쟁의 장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명분은 행정입법 침해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 자신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보다 더 강한 법안을 공동 발의했던 과거 행적은 명분을 약화시켰다. 또 다른 명분인 '신의 지키는 정치, 배신 없는 정치'는 '유승민 찍어내기'라고 비판 받았다. 가치 대신 '권력의 충돌'이 거부권 행사 요인으로 부각되는 이유다.

웨스트윙에서 바틀렛 대통령은 종종 역사 이야기를 꺼낸다. 전임 대통령들의 업적을 되짚으며 역사에 기억될 자신의 행보를 고민한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은, 훗날 역사가들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소재로 호출한다면 어떻게 평가될까. 역사책에 얼마나 의미 있는 논쟁으로 기록될 지 상상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