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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개정은 정치의 영역이지만 헌법 적용은 생활의 영역이다. 1987년 개헌이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개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에 의한, 정치를 위한 개헌. 직선제 요구라는 강렬한 역사적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개입한 타협의 영역은 공백으로 남았다.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수용 의사를 밝힌 6.29 선언에서 DJ(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복권 의사를 밝힌다. 앞서 군사법원에서 사형헌고를 받았던 DJ다. 민주화 투쟁에 따라 기정사실이었던 사면이지만 사면을 발표한 날짜가 공교롭다. 호헌선언을 거두면서 아울러 DJ의 출마길을 열어준 거다. 신군부는 이를 정권 재창출의 결정적 한수로 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스스로 회고록에서 이 대목에 대해 "(노태우는) 내 도움으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고 할 정도다.
'87년 개헌' 8인회담의 민정당(전두환정권) 측 대표였던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최근 한 방송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DJ나 YS나 우리 당 노태우 대표나 협상 안건에 대해 세세한걸 따지기보다는 대통령이 하고 싶어 그러는지 빨리빨리 끝내라더라"며 "6.29 선언 안에 DJ 사면복권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게 신의 한수였다"고 말했다. DJ와 YS의 분열을 신군부가 예측하고 직선제를 받아들였다는 거다. 이른바 6.29 선언 정치적 타협론의 핵심이다.
실제 양김은 분열했다. 정치인들은 예견돼 있던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양측 모두 양보할 이유가 없었고 양측 모두 노태우에게 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전두환정권 등 신군부는 양김의 분열을 보며 무릎을 쳤다. 분열의 결과는 아는 대로다. 전두환 정권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화 세력은 타격을 입었다. 구체제 유지에 대한 고민은 둘째 문제였다.
물론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사회가 목숨을 걸고 관철시킨 직선제 쟁취에 정치 논리를 들이대며 비하할 이유는 없다. 당시 전두환정권은 직선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위수령을 통한 군 투입을 검토했다. 다시 체육관 선거로 노태우 정부를 세운 후 국가원로회의를 구성, 전두환이 의장을 맡은 후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상왕정치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민중항쟁에 맞부닥친 군부독재는 이 뜻을 관철하지 못한다. 미국의 압박과 올림픽이 임박했다는 상황도 작용했지만 직선제의 전국민적 열망에 가로막힌 까닭이 가장 컸다. 김성식 국민의당 의원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자, 군정을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심플한 구호가 결국 개헌과 직선제로 연결된 것"이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야권 분열은 직선제 개헌 쟁취의 반대급부였다는 거다.
김 의원은 "개헌은 누가 뭐라해도 민주항쟁의 결과물"이라며 "민주항쟁에 의해 전두환 정권이 아예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하니까 6.29 선언이라는 걸 통해 '개혁하겠다'고 항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개혁의 반대세력이 없는, 민주세력이 요구하는 큰 방향을 향하는 선거적 민주주의가 중심이 된 개혁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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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31일 열린 민정당과 민주당 8인 정치회담에서 민정당 권익현(왼쪽), 민주당 이중재(오른쪽) 협상대표가 개헌협상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사진=국회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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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김의 분열은 뿌리깊은 현대사의 구도정치를 고착화시켰다. 1987년 12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YS가 28.0%, DJ가 27.0%로 표를 나눠가졌다. JP(김종필 전 총리)가 그 와중에 10.8%를 득표했다. 분열에 따른 선거 패배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유신을 뿌리로 하는 영남패권이 더 뚜렷해졌다.
민주화세력의 분열이 더 뼈아팠다.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은 "87년 개헌 당시 운동세력은 곧바로 DJ와 YS로 분열해 대립했다"며 "김무성 바른정당 고문 등은 YS를 밀었던 세력이라고 보면 되고 나는 DJ를 지지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통합을 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각자 나와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고 성취감은 곧바로 좌절감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양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YS와 DJ 분열에 운동권이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것 자체가 패착이었으며 당시 단일화를 강하게 요구했어야 한다"며 "학생운동권이 DJ 지지로 돌아서면서 민주세력이 갈라지고 국민들의 염원도 물거품이 됐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이 이어졌고 헌법도 직선제 하나만 달라졌을 뿐 4.19 의거 이후 성숙돼 온 인권과 기본권 등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으면서 사실상 개헌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1987년 개헌이 낳은 민주화세력의 분열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1990년 민주당의 김영삼, 공화당의 김종필은 민정당과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탄생시킨다. DJ는 평민당을 이끌고 맞섰지만 호남 중심의 소수 야당으로 남았다. 진보정당은 설 자리를 잃었고 독재가 불씨를 지핀 지역구도는 이후 한국 정치사의 뿌리 깊은 병폐로 남았다.
전문가들은 '87년 개헌'을 "정치를 위한, 정치에 의한 개헌"이라고 평가한다. 민중의 에너지가 개헌을 이끌었지만 새 헌법을 만든 이도 정치인, 새 헌법에 지대하게 영향을 받은 이도 정치인이었다. 정작 헌법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국민들은 개헌의 문을 열었을 뿐 각론에 접근하지 못했다. 김성식 의원은 "다시 개헌을 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정치인들에게 '진짜 개헌을 원하느냐'는 반문을 던져야 한다"며 "이는 곧 '국민의 삶의 현실이 나아지도록 할 것이냐'는 질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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