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지침'이 뺏아간 전국민 '칼퇴근'

[the300] ['시행령 공화국' 탐사리포트 ②] 직장 여성 김나리씨, 가상의 하루

해당 기사는 2014-06-20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PDF 런치리포트 뷰어
헌법,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우리나라의 법 체계는 이런 위계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령, 고시, 지침 등 정부의 '행정입법'이 상위의 '법률'을 거스르고 훼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행정독재' 또는 '법령의 하극상'으로 불리는 이 같은 사례들을 가상의 한 직장 여성의 하루를 통해 살펴본다.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 오전 5시20분, 김나리씨(26·여)는 마루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마루에선 막내동생이 이미 옷을 차려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 어디 가?" "응 편의점 알바 오늘부터 시작이잖아"

동생이 군 제대 후 복학 전까지 잠시만 하겠다던 아르바이트다. 하지만 새벽부터 나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그런데 벌써 나가?" "응 새벽 6시에는 문 열어야 한대"

집을 나서는 동생을 보며 나리씨는 궁금해졌다. "편의점을 새벽 6시에 열어 그 시간에 한시간 더 팔아봐야 인건비 빼고 얼마나 남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점 점주가 원치 않더라도 오전 6시에는 반드시 문을 열어야 한다. '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가맹사업법) 시행령 때문이다.

당초 법률은 편의점 등 가맹(프랜차이즈)본부가 가맹점주에 부당하게 영업시간을 강제할 수 없도록 하는 취지로 지난해 8월 개정됐다. 이에 따라 오전 1∼7시에는 가맹점주가 자율적으로 문을 닫을 수 있도록 하는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 그러나 결국은 오전 6시에는 반드시 문을 열도록 하는 내용으로 후퇴한 채 지난 2월 시행령이 개정됐다.


# 오전 7시40분, 출근을 위해 기초화장을 마친 나리씨가 마지막으로 분홍색 블러셔(볼터치)를 꺼내들었다. 톡톡 두드리듯 바르니 양 볼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분홍 색감 덕에 얼굴이 화사해졌지만 마음 한켠으론 찜찜하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본 기사 때문이다. "타르색소가 화장품에도 들어있다는데…. 이 볼터치도?". 갑자기 타르가 양 볼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타르색소는 석탄타르를 원료로 합성한 색소다. 우리나라는 화장품에 타르색소를 넣는 것을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 현행 화장품법은 안전관리를 위해 '화장품에 사용할 수 없는 원료'를 사용한 화장품의 제조·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원료가 무엇인지는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하도록 하고 있어 기준이 모호하다.

식약처 고시에 따르면 '적색 205호' 등 18종의 타르색소는 '눈 주위 및 입술에 사용할 수 없음'이라고 돼 있다. 눈 주의나 입술이 아닌 볼에 쓰는 볼터치 등은 피부에 그대로 스며드는 화장품임에도 타르에 대한 규제를 받지 않는 셈이다.


# 오전 8시 10분, 아파트 지하 주차장. "부르릉~" 나리씨가 출근을 위해 자가용에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5년 된 차다. "내년쯤에는 새 차를 사야 하는데···". 당장은 돈도 없고, 할부이자도 만만치 않아 새 차를 사려면 내년까지는 돈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가 걱정이다. 바로 '저탄소차 협력금'이다. 주머니 사정상 외제차는 사기 어렵고 국산차를 사야 하는데, 내년부터는 대부분의 국산차를 살 때 최대 수백만원의 탄소부담금을 추가로 물어야 한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대기환경보전법' 개정안에 따른 것이다. 탄소 배출량이 적은 '친환경차' 구입을 장려하는 것이 법안의 취지다. 그런데 환경부가 시행을 위해 내놓은 기준은 '외제차' 구입을 장려하고 '국산차' 구입은 어렵게 하고 있다. 독일 등 외국의 저탄소 차기술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환경부 기준이 시행되면 기아 쏘울을 살 때 100만원의 부담금을 내고 BMW i3를 사면 700만원의 보조금을 받게 된다.

(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BMW i3


# 오전 10시20분. "아이구···". 중견기업 면세점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는 나리씨의 귓가에 부장님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천신만고 끝에 최근 시내에 면세점을 열었는데, 인근 대기업 면세점이 규모를 3배로 확장하기로 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당초 인근 대기업 면세점의 규모가 작아 승부해볼만 하다고 보고 개점했는데,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대기업들 등살에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구만". 한숨만 내쉬던 부장님은 결국 담배를 꺼내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대기업 면세점의 '무한확장'을 막기 위해 2012년 관세법이 개정될 때 당초 규제 기준은 '면적'이었다. 면적을 묶어두면 당연히 신규 개점 뿐 아니라 확장까지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정된 시행령에서 갑자기 기준이 '면적'이 아닌 '점포수'로 바뀌었다. 대기업 면세점의 점포별 확장을 사실상 허용하면서 중견기업 면세점들은 규모 면에서 밀릴 수 밖에 없게 된 셈이다.


# 오후 12시50분, 서둘러 점심을 먹은 나리씨가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타르색소 무첨가' 립스틱을 사려고 진열대를 살피는데 '30% 세일'이라고 적힌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손에 쥐어든 나리씨. 하지만 이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진짜 할인 중일까? 가게 마음대로 써놓고 세일이라 속여도 알 길이 없는데…". 립스틱 용기를 살펴봐도, 포장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가격 표시는 없다. 매장 진열대에 붙은 가격 택(tag)이 전부다.

국내 상당수 화장품 브랜드숍들은 화장품 가격을 해당 진열대에만 표시하고 있다. 가격 스티커가 부착된 경우도 있지만, 상점이 임의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가격을 확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화장품법은 판매자가 화장품 포장에 가격을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화장품 가격표시제 실시요령'은 '곤란한 경우'에는 가격을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률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된 셈이다.


# 오후 6시40분, "자 다들 저녁 먹고 하지". 부장이 부원들을 인솔(?)해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나리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이다. '칼퇴근'이란 말은 잊은지 오래다. 분명 입사할때는 '출근 오전 9시, 퇴근 오후 6시'라고 들었는데···.

현행법상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다. 2003년 8월 이런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보다 가까운 '고용부 행정지침'에는 노사합의시 평일 12시간, 주말·휴일 16시간을 더해 총 최대 68시간까지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고용부가 2000년 9월 현장에 내려보낸 지침이 법률 개정 이후에도 버젓이 통용되며 전국민의 '저녁'과 '주말'을 앗아가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