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법률주의와 국회의 예산조정권

[the300][정재룡의 입법이야기]국회에 책임 묻는다면 권한부터 줘야

편집자주  |  정재룡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을 통해 전하는 국회와 입법 스토리
현재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때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는 헌법 57조에 따라 예산심사에서 정부가 허락하지 않으면 감액 이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수정할 수 없다. 이런 제도는 삼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이 작동되어야 하는 대통령제에 부합하지 않고 세계적으로도 내각제 국가 이외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내각제 국가 중에서도 스웨덴 등은 제한적인 범위에서 증액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일 여당이 개헌안을 발표했는데,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고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의 총액 범위 내에서 국회가 자유롭게 증액 조정도 하고 새 비목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예산 편성권마저 의회가 갖는 미국과는 차이가 있지만 현행에 비하면 매우 전향적인 것이다. 예산법률주의는 예산에 대한 주도적인 권한과 역할을 국회에 부여하기 위한 취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여당의 개헌안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국회가 정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예산 편성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정해구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위원장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열린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제공) 2018.2.13/뉴스1

그러나 여당의 개헌안은 여전히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국회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원안으로 심사하게 되는데, 설령 야당이 예산안의 수정을 요구해도 정부와 여당이 반대하면 원안이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 입법권에 대한 정부의 견제 수단은 기본적으로 대통령 거부권이다. 따라서 여당의 개헌안에도 국회에 대한 정부의 견제를 위하여 대통령 거부권을 두면 된다.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면서까지 지금과 같이 국회의 모든 사업 단위의 증액 조정과 새 비목의 설치에 대하여 정부의 허락을 받도록 하는 것은, 예산법률주의를 형해화하는 것이고, 국회를 정부의 하위기관 취급하는 것이다.

또한, 여당의 개헌안처럼 국회가 자율적인 예산조정권을 갖게 될 경우 선심성·지역구 예산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국회가 자율적인 예산조정권을 갖는다 해도 정부를 포함하여 다수 의원들의 중지를 모아서 결정하고, 기본적으로 감액한 예산의 범위라는 제한이 있으므로 낭비성 예산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것도 기우라고 본다. 그런 우려는 국회 불신 풍조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현재 입법권에 아무런 제한이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에서 볼 때 국회가 자율적인 예산조정권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예산법률주의와 국회의 권한 강화가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예결위 상설화, 투명성 강화 등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예산과정은 정치과정이다. 따라서 예산에는 국회의 심사과정뿐만 아니라 정부의 편성과정에서도 정치적 고려가 중요하게 개입한다. 따라서 '국회는 선심성 예산을 증가시키지만 반면 기재부는 선심성 예산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투명한 절차를 거쳐서 중지를 모아서 심사하는 국회가 기획재정부보다 투명성이 더 높다. 종래 기재부가 예산 편성에 전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부처를 상대로 갑질·전횡 문제가 제기되어 왔는데, 국회가 자율적인 조정권을 갖게 되면 그런 문제도 시정할 수 있게 된다.

국회는 매년 예산심사 때마다 쪽지예산 등을 이유로 매도를 당한다. 난데없이 지금도 그런 류의 보도가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예산 증액에 아무런 권한이 없는 국회가 책임만 뒤집어쓰는 것이다.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개헌으로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는 상황이라면 국회가 예산심사에서도 본연의 입법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기재부가 타성에 안주하여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재정민주주의 실현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회가 조만간 개헌을 통해 예산조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현재 국회운영위원회에는 유성엽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회의 예산조정권 인정 요구 결의안’이 계류 중이다. 이 결의안은 헌법 57조를 재해석하여 지출예산 각 항의 하위단위에서는 국회가 자율적으로 증액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새 비목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결의안이 제시하는 국회의 예산조정권의 범위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의 총액으로 설정한 여당의 개헌안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따라서 국회는 차제에 이 결의안을 조속히 채택하거나 공청회 등을 통해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약 이 결의안의 취지대로 헌법 재해석을 통해 국회에 예산조정권이 주어진다면 국회는 제한적 범위에서라도 마침내 예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같이 갖게 될 것이다. 개헌을 하지 않고도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상당히 개선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외부기고/칼럼]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the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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