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폴리테이너'(politainer). 정치인(politician)과 연예인(entertainer)의 합성어다. 연예인 출신 정치인을 뜻한다. 미국에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아놀드 슈왈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대표적이다. 엔터테인먼트 강국인 한국은 폴리테이너 강국이다. 1978년 최초의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홍성우를 시작으로 최무룡,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정한용, 이주일, 최희준, 신성일, 신영균 등이 배지를 달았다. 앵커·MC 등 방송인 출신으로 범위를 넓히면 이들로만 상임위원회 2~3개는 만들 수 있다.

지난 5월 19대 대선을 기점으로는 '2세대 폴리테이너'가 탄생했다. 앞선 이들이 연예인·방송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면 2세대는 현역 정치인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예인과 다름없이 '예능감'을 뽐내며 활약한다. '정치'는 TV 밖으로 사라지고, '끼'와 '예능감'이 TV 안을 채운다.

◇시청·국회 넘어 '예능계 접수'= 지난달 10일 첫방송을 시작한 SBS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출연자의 일상을 여과없이 담은 '리얼리티' 기법과 패널들이 이를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관찰' 형식을 결합한 최신 트렌드의 예능 프로다. 여기에 고정 출연자로 이재명 성남시장과 그의 아내가 등장했다.

지난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이 시장. 당시 각종 파격 발언으로 화제를 낳았던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화려한 말솜씨를 뽐낸다. 지난달 17일 방송분에서 그는 아내와 농담을 주고 받다가 "나는 번식 기능을 잃었다"며 정관수술 사실을 공개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를 본 한 시청자는 "소심한 반항이 너무 귀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시장을 연예인 보듯 대하는 시청자들이 적잖았다.

기동민 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아들과 tvN '둥지탈출'에 출연 중이다. 아들 대명씨가 연예인 자녀들과 함께 네팔로 떠나 생활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이 프로그램은 기 의원의 출연을 "국회를 넘어 예능까지 접수! 정치계 비주얼 담당 기동민!"이라고 홍보한다. 바야흐로 '폴리테이너2.0' 시대가 도래했다.

국회 입성 전에도 방송에 얼굴을 자주 보였던 표창원 민주당 의원은 예능계에서 잔뼈가 굵다. 고등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가상의 살인사건을 푸는 JTBC '크라임씬3' 등 스타급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다. 방송가에서 그는 정치인이 아닌 예능인이다.  

◇'정치 예능'의 진화=이 시장과 기 의원처럼 정치인 출연자가 현직 신분을 내려놓고 연예인의 역할을 하는 형식은 19대 대선 이후 등장했다. 이같은 진화는 앞서 봇물처럼 쏟아진 시사·정치 소재 예능 프로그램들이 자양분이 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탄핵 정국을 계기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부터 입지를 다져온 JTBC '썰전'을 비롯해 TV조선 '강적들', 채널A '외부자들', MBN '판도라' 등이 이 시기를 풍미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출연 정치인들만 수십명에 달했다. 최근에는 KBS '냄비받침'이 화제다. 지난 6월 초부터 방송된 이 프로그램에는 홍준표, 유승민, 심상정, 안희정 등 낙선 대선주자들이 일제히 출연했다. 유머를 섞어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진솔한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과거 정치인들은 주요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방송 프로그램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지만 '소통'이 시대정신인 지금, 정치인들에게 대중 친화적 코드는 매우 중요하다. 인터뷰 형식의 정형화된 프로그램 출연에 머물던 정치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허물며 대중과의 거리를 연예인만큼 좁히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