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법안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인격체 같다. 정신(법 취지)과 육체(법 조항)가 있다. 개정이 반복되며 살을 붙이기도, 빼기도 한다. 그렇게 사연이 쌓인다. 그 역사는 법의 얼굴(face)에 고스란히 남는다. ‘face법’을 통해 사연많은 법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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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 86년생 창업법
나의 이름은 '중소기업창업지원법', 줄여서 ‘창업법’으로 불린다. 내가 태어난 1986년은 산업 불균형이 심각해진 때다. 대기업·중화학 중심의 성장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정부는 기술 혁신과 균형적 산업 발전을 내걸었다. 인력, 기술, 자본 등 국가 자원을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에 총동원키로 방향을 세우고 나를 만들었다.
창업지원기금의 설치하고 창업자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창업한 기업은 일정 기간 세금을 감면해준다. 업종별 육성대책으로 성장에 밑거름을 뿌렸다. 중소기업에 경영 노하우 등을 전수하는 중소기업상담회사도 법적으로 인정해줬다. 요즘말로 컨설팅 기업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돈이 없지 기술이 없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똑똑한 창업자들이 꽤 많다. 그들을 위한 창업투자회사와 창업투자조합도 내 몸에 담았다. 벤처캐피탈(VC) 개념도 내가 원조인 셈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창업보육센터, 창업기획자(엑셀러레이터) 등 창업기업은 물론이고 유형·무형의 창업 투자와 관련된 '스킬'을 하나 둘 장착하기 시작했다. 지난 31년간 25번 개정되면서 얻은 무기들이다.
# 그 여자, 97년생 벤처법
나의 이름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다. '특별'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만큼 당시엔 파격적이고 획기적이라며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내가 태어날 즈음 우리 경제는 많이 아팠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고,노동자들은 실직했으며 주력 산업들은 생기를 잃었다.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 동력을 찾는 시점이었다. 그 선택이 ‘벤처붐’이었다. 나로 인해 중소기업수가 급증했고 벤처는 대기업 퇴직 인력들의 새로운 창업과 일자리 창출의 창구가 됐다.
창업법도 있는데 왜 특별법이 새로 나왔냐는 질문도 받았다. 1990년대초 미국 실리콘밸리에 출발한 벤처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정보통신 등 신기술은 신경제(new economy)를 일궜다. 우리도 과감히 글로벌 자본과 기업에 문을 열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특별법 제정에 나섰다. 외국인도 벤처에 투자하거나 벤처투자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신설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총 1조 9200억 원의 창업자금이 8000여 기업에게 지원됐다. 지금은 익숙한 네이버, 안철수연구소(안랩), 넥슨, 메가스터디, 한글과컴퓨터 등이 세상에 나온 데 내 덕이 컸다고 생각한다. 벤처 성공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모태펀드의 태동이다. 2005년, 법을 개정하면서 중소기업모태조합 설립이 가능해졌다. 민간투자기업들이 한국벤처투자조합(KVF)을 결성해 정부기금과 예산으로 만들어진 모태펀드로부터 목돈을 출자받아 벤처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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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 환희. 다툼. 조정.
창업법과 벤처법. 둘의 시너지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벤처붐에 속도를 더했다. 1995년 500개 미만이던 벤처기업은 매년 2배씩 증가했다. 벤처의 폭발적 성장은 증시로 이어졌다. 벤처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조성된 미국의 나스닥 주식시장의 강세처럼 우리도 1996년 문을 연 코스닥시장이 매섭게 성장했다. 2000년 코스닥지수는 2834로 최고가를 경신했다.
물론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두 법 사이엔 깊은 갈등도 있었다. 창업법은 창업투자조합과 창업투자회사가, 벤처법은 한국벤처투자조합과 개인투자조합, 모태펀드 등이 주체로 규정돼있다. 하는 역할은 차이가 없지만 벤처캐피탈(VC)이 어떤 이름을 고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규제를 받아야 했다.
해외 투자 가능 여부, 창업 기업 의무 투자 비율, 중견기업 투자 기준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시장의 변화에 따라 제도를 보완하려고 하면 창업법과 벤처법, 두 법의 시행령, 그리고 시행규칙까지 모두 뜯어고쳐야 한다. VC도, 벤처기업들도, 정부도, 공공기관도, 국회도 모두가 혼란스러워한다.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도 길게 드리웠다. 정부 지원이 커질수록 모럴 해저드(도덕적 헤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기업 사냥꾼들이 불법대출과 주가조작, 횡령 등의 수단으로 벤처기업을 인수·합병해 증권시장을 교란시킨 소위 '4대 게이트' 사건도 터졌다. 벤처붐은 버블로 변질됐고 법은 '건전성 담보'를 위해 규제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창투사의 부동산 등 일부업종 투자금지, 경영 공시의무 부과, 개인투자조합 등록제, 벤처확인제도 등이 속속 생겼다.
# 세대 차이…이제는 '꼰대'?
창업법과 벤처법은 직접 개정과 타법 개정을 포함, 160여차례 고쳐졌다. 하지만 한계가 존재한다. 바로 시대 변화다. 하루가 달리 변하는 시대 흐름을 법이 쫓아가기 역부족이다. 별 거 아니던 조항들이 요즘 벤처인들 사이에 소위 '꼰대' 규제가 됐다.
최근 10여년간 인공지능, 블록체인, 사물인터넷 등 초고도화된 신기술이 다양한 신산업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국내 벤처 투자 관련 법은 여전히 금지 업종과 허용 업종을 열거하는 '포지티브' 방식이다. 창업과 벤처 지원을 위한 법이 아니라 기술 변화를 가로 막는 규제법이 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다른 사례도 많다. 기업 성장에 투자하라고 지원한 정부 돈을 부동산 구매에 쓰지 못하도록 '부동산 투자 제한'을 걸어놨는데 지금은 '공간공유(Co-working Space) 스타트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조항이 됐다. 숙박업이나 대부업은 '벤처'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투자 금지를 해왔다. 이에따라 에어비앤비, 홈어웨이 등과 같은 공유숙박플랫폼은 현행법에 그대로 적용하기 곤란하다. 핀테크를 기반으로 한 전자어음 담보 P2P(Peer to Peer) 대출중개 플랫폼은 하나의 산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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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의 장점 닮은 '벤처촉진법' 잉태
창업법과 벤처법은 각 법안의 장점만 담은 '벤처투자촉진에관한법률'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준비를 진행중이다. 주무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초 제정안을 공개하고 법제처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제정안은 4차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춰 자율성과 최소 규제에 방점을 찍었다. 벤처생태계가 더 이상 모태펀드와 같은 정부 자금 중심이 아닌 민간 자금 중심으로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제정안엔 ‘중소기업, 창업자, 벤처기업 등에 대한 투자에 관한 사항을 정해 벤처투자산업 육성과 투자 활성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목적을 명시했다. 벤처투자 업종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하는 한편 신산업, 새로운 제도에 한껏 문을 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투자수단으로 활용되는 조건부지분투자(SAFE)를 도입키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SAFE는 전환조건과 기업가치 범위 정도만 포함한 단순 계약 형태로 투자하는 방식이다.
창업투자조합, KVF으로 나뉘었던 벤처 펀드는 일원화한다. 벤처투자시장의 진입장벽을 완화해 전문인력 요건을 낮추고 창업투자회사의 경영평가제도는 폐지된다. 벤처투자의 족쇄로 여긴 벤처투자조합의 투자의무비율(40~50%)도 개선된다. 증권사나 엑셀러레이터도 벤처투자조합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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