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그리고 지금...개헌 동력은 역시 국민

[the300][내삶을 바꾸는 개헌]②87년 헌법엔 직선제가 시대정신..이제 국민이 원하는 개헌 해야

해당 기사는 2017-07-17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런치리포트 매거진 보기

6.29와 87년 개헌은 국민들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꽃피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결렬된 후 조직된 평화대행진./사진=머니투데이DB


‘내 삶을 바꾸는 개헌’에 앞서 1987년을 떠올렸다. 지금의 헌법이 태동된 그 때다. 머니투데이 더(the)300이 만난 정치인들은 일제히 '87년엔 직선제가 시대정신'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운동가와 학생으로 직선제 쟁취에 힘을 보탠 이들이다. 국민의 여망이 거대한 에너지가 돼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개헌 이후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를 내놨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열로 군정종식에 실패한 아픔이 뒤따랐다. 

 

87년 개헌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대한 변곡점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이를 작은 옷으로 만들었다. 당시 논의에 포함되지 못했던 대통령의 권력분산 문제와 각종 기본권들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 민주화가 낳은 87년 체제라는 엔진을 이제는 신개념 대형 엔진으로 바꿔야 한다는 거다. 김성식 국민의당 의원은 "87년 당시는 직선제만 얻어냈을 뿐 대통령의 권력 분배까지는 가지도 못했다"며 "당시 개헌 주체들의 공로이자 동시에 한계"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87년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감옥에서 맞았다. 노동운동을 하다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간 게 1986년 12월. 고문이 뒤따랐다. 김 의원은 "(수감 뒤) 오십며칠째쯤 되는 날이었던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직후 고문이 딱 멈췄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때도 직선제 개헌만으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며 "급진적 주장이 많았지만 대안이 되기엔 생경한 수준이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에 논의가 미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1986년 서울대에 입학, 이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 간부를 지낸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의 회고도 같다. 그는 "(개헌을 어떻게 할지) 각론은 그저 정치인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며 "학생사회의 논의의 주된 이슈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 "직선제가 끝났으니 나머지는 헌법기술자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던 시절이었다"고 덧붙였다. 역시 직선제라는 거대한 이슈 앞에 개헌의 각론은 국민들의 시선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증언이다.

 

6.29 선언와 87년 개헌의 주요 세력 중 정작 개헌투표는 하지 못한 경우도 적잖았다. 나이 탓이었다. 성균관대 87학번인 김관영 국민의당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4.13 호헌조치 후에는 거의 매일 배낭에 화염병을 넣고 청계천으로 간 이른바 병조(화염병 담당)였다"고 말했다. 그는 "6.29 선언이 나오고도 개헌이 정말 될까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국회에서 매듭이 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사회의 열망에 부응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이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DB(출처=민족문화대백과)

하지만 개헌 이후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YS와 DJ의 분열로 군사정권이 연장됐다. 정치권에도 격변이 이어졌다. 고려대 학생이던 이양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후 DJ가 '젊은피 수혈'이라며 총학생회장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면서 소위 '386'이 탄생했는데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며 "'운동권 엘리트의 길을 걸으면 정치인의 자리를 보장받는구나'하는 배신감을 느꼈고 386이 이후 정치사에서 제대로 족적을 남기지 못하면서 비판적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생사회도 거센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하태경 의원은 "6.29 선언 자체에 대해서도 기만이라는 측과 받아들인 후 대선에서 바꾸자는 측이 분열했다"며 "민주화운동 세력이 큰 틀에서 갈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 대투쟁도 이어졌다. 하 의원은 "이걸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과 노동개혁이 혁명의 주체가 됐으니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바로 이어가야 한다는 세력까지 나오면서 아수라장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87년 체제가 빛나는 민주화의 변곡점이라는데는 이의를 달기 어렵다. 김성식 의원은 "독재정권이 연장됐던 노태우 정권이 오히려 현행 헌법 하에서 정치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87년 헌법이 정치경제적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5공청산, 청문회 도입,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뒤따랐다. 청와대의 주인은 여전히 군부였지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이 흐름이 YS, DJ 등 문민정부와 노무현으로 이어졌다. 87년 체제가 주춧돌이 됐다.

 

87년 개헌 당시 동력이었던 세대가 이제 다시 2018년 개헌을 준비하는 중심에 섰다. 이종구 바른정당 의원은 개헌특위를 출범하는 자리에서 "부친인 이중재 옛 통일민주당 부총재가 개헌을 위한 8인 기구의 멤버였는데 이제는 아들인 자신이 개헌특위에 참여하게 됐다"며 감개무량해했다. 87년 헌법이 한 세대에 준하는 세월을 굳건히 지켰다는 거다. 하지만 역사가 만든 그 빛나는 외발자전거엔 이제 너무나 많은 짐이 지워졌다. 바퀴를 늘리고 타이어를 갈고 새로 개비해야 한다.

 

일상을 바꾸는 개헌이 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정치권이 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 매몰된 가운데 국민들은 개헌에 '나와 우리 가족의 기본권'이 어떻게 반영될지를 궁금해한다. 김관영 의원은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기본권 면에서 과거에 생각지 못한 새로운 권리를 헌법에 넣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본권의 이해당사자들과 이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 예컨대 재판 과정에서 기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을 불러다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식 의원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말 '개헌을 하지 않고도 국민들이 분노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일들이 해결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보면 개헌을 해야 하느냐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히 나온다"며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건 중임제냐 5년 단임이냐 대통령이 몇년을 일하느냐는 식의 정치냐가 아니라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정치로 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더 문제해결을 잘하는 그룹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거다.

 

권력구조 개편의 성패도 결국은 국민이 얼마나 필요성을 느끼느냐에 달렸다. 하태경 의원은 "개헌을 하게 되면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부패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결국 부패하지 않는 권력과 실패하지 않는 권력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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