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의료 한류'…중동의 재발견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일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순방에서 귀국하자마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피습 당해 입원 중인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문병하기 위해서다. 

'테러'에 대한 충격으로 경호 수위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박 대통령 일행을 안내했던 병원의 한 관계자가 "병원에 터번을 쓴 중동 남자들이 돌아다녀 순간 깜짝 놀랐다"는 농담을 던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중동인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인식하는 무개념 농담일수 있지만, 실제로 요즘 이 병원에서는 중동에서 불고 있는 '의료 한류' 덕에 터번을 두른 중동인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2011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찾은 UAE 환자는 10명 정도로 미미했지만, 2013년 351명으로 급증했다. 같은 해 이를 포함해 중동 4개국에서 한국을 찾은 환자는 2552명으로 총 207억원의 진료비를 쓰고 갔다. 더운 기후와 고열량 음식 섭취에 따른 비만, 심장질환, 당뇨 등 성인병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탓이다. 이들 국가들의 비만율은 비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32%)보다 높고, 비만 합병증인 당뇨병 유병률도 성인 평균 35%의 2배인 60%로 알려졌다. 

나라 곳간은 오일머니로 쌓여있는데 의술은 떨어지니, 2000년대부터 미국과 독일, 영국 등으로 환자를 내보내는 '의료 관광'이 본격화됐다. 환자들의 항공권, 치료비, 가족 거주비 등 일체를 지원한다. 2009년 8만5000명의 UAE 국민이 해외에서 쓴 의료비가 2조원을 넘었다. 


돈이 아무리 넘쳐도 이 정도면 재정에 부담이 된다. 그래서 이들 정부는 최근 의료비가 저렴하지만, 일찌감치 의료관광 산업을 키운 태국이나 싱가포르 병원을 추천하고 있다. 이슬람인들이 먹는 '할랄식품'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이번 순방에서 UAE와 할랄식품 인증 협력에 합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동 현지의 '의료 한류' 열풍은 더 거셌다. 1970년대 '제1의 중동 붐'을 주도했던 건설사들이 국내업체 간 과열 수주경쟁, 중국 등 후발업체들의 저가공세에 고전하며 '이제는 중동을 벗어나자'고 발버둥 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UAE에서 한국 의료진이 행한 첫 수술은 8시간이나 걸리는 개심 수술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끝냈다. "휴대폰과 자동차만 잘 만드는 줄 알았는데, 수술도 잘한다"며 흡족해했다는 후문이다. 이슬람 율법 상 현지 여성들은 맨살을 드러낼 수 없다. 물리치료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는 신뢰가 쌓여 맨살을 드러내고 치료를 받을 정도다. 건설노동자로 성실함을 보여준 한국인들이 '친절, 실력, 가격'의 의료기술로 무장해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사우디, UAE에 이어 카타르와 쿠웨이트도 정상회담에서 의료 협력을 강하게 요청했다.


서울대병원이 UAE 현지 병원 파견 근무를 모집했을 때 예상외로 지원자(170명)가 몰렸다. 우리처럼 병원을 위탁운영해도 의료진이 현지 근무를 꺼려 행정인력만 내보내는 미국, 유럽 국가들과 달랐다. 지방의대 입학 점수가 서울대 공대를 상회할 정도로 '닥치고 의대' 시대라는 개탄도 나오지만,  '의료 한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수 의료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현지 파견 의료진은 "중동의 보건의료 정책의 목적은 자립과 글로벌화"라고 일깨워주기도 했다. 자국민의 의료관광을 되돌리는 것은 물론 '포스트 오일시대'에 대비해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관광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분위기에 들떠 순방 성과 홍보에만 치중할 게 아니라 차분하게 현지 상황과 정보분석을 하고, 지원책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장밋빛 미래에만 빠져있으면 '제2의 중동 붐'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