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태어나든지" 일갈한 文…자주외교의 '선'은?

[the300]남북협력 추진하면서도, 마냥 급진적 외교 일변도는 아닐듯

【서울=뉴시스】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0일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문재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고 1일 보도했다. 2019.07.01. (출처=노동신문) photo@newsis.com
"그럴거면 그냥 미국에서 태어나지 그랬나."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어느 날 참모들과의 회의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북협력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미국의 반대가 예상되는 점에 대해 일부 참모들이 분통을 터뜨리자 자제를 요청하며 한 말이었다.

문 대통령을 두고 "이번 정부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 근거이기도 하다. 자주외교를 하면서도, 미국의 힘을 인정해야 하고, 미국과 동맹관계를 중시해야 하며, 미국이 정한 질서 내에서 운신의 폭을 모색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관점이 담겼다.

실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청와대 안팎에서는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선택은 반대였다. 지지층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으면서도 미국이 추구하는 '최대한도의 압박'에 동참했다. 북측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테이블에 나오기까지 기다렸다.

문 대통령의 접근방식은 선(先) 북미협상 타결, 후(後) 남북 경제협력이었다. 노무현 정부 국정의 2인자를 거치며 마련된 생각이라고 한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던 2007년 8월 남북정상회담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추진돼온 각종 남북 경협사업이, 이후 북미관계 악화로 인해 물거품이 돼 온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 후 북미협상의 중재자·촉진자를 자처하며 협상을 진행해온 이유다.

그런데 최근 다소 급진적인 외교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박지원 국정원장,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자주파 외교라인'이다. "한미동맹이 외교의 전부는 아니다"는 최 차관의 말로 성향을 요약할 수 있는 라인이다.

이들은 이미 한미 간 한반도 문제 협의기구인 워킹그룹을 두고 "남북관계를 제약한다는 비판적 견해가 있다. 2.0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따로 떼어놓자는 주장. 국제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라면, 미국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적으로 남북교류를 시작하겠다는 뜻에 가깝다.

여권에서는 이런 라인업을 두고 "일단 사고 한 번 쳐봐라는 대통령의 주문으로 보인다"는 말까지 나온다. 참모들에게 "그럴거면 미국에 태어나든가"라고 외치던 문 대통령의 모습과 거리감이 있다.
[서울=뉴시스]박영태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7월29일 청와대 본관에서 이인영 신임 통일부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은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부인. 2020.07.29. since1999@newsis.com
문 대통령의 이런 변화의 이유로는 북측이 지난 6월에 진행한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가 꼽힌다. 문 대통령은 당시 북측의 폭파에 충격을 받고, 분노를 하면서도, "남북관계를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그 자체가 목표이면서도, 우리의 '외교 카드'라는 의식 역시 깔렸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통해 "우리가 북한과 대화할 때 비로소 정보의 양도 많아지고 정보의 가치도 올라간다"며 "한반도 문제를 주도해야만 동북아 정세에서 열쇠를 쥔 주인공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그래도 오는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은 '자기편 줄세우기'에 나선 모양새다. 미중 사이에서 안보부터 경제까지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자체적인 '외교 카드' 하나쯤은 마련해둬야 하는 시점이다. 미중의 공통 관심사안인 '북핵'이 이에 적합한 카드인 셈이다.

2021년은 국내 대선이 1년 남은 시점으로, 정권 입장에서는 대북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미 대선이 끝나면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재개하며 협상을 촉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남북 대결구도를 희석시켜서 도발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는 게 중요하다.

향후 초점은 이같이 변화한 문 대통령이 '자주파 외교라인'에 얼마만큼의 재량권을 줬는지 여부에 맞춰진다. 인사를 통해 '사고 한 번 치라'는 메시지를 낸 것은 맞지만, '미국이 중요하다'는 생각 역시 여전하다. 마냥 급진적 외교 일변도가 되진 않을 것이란 의미다. 자주파 라인업을 선보인 문 대통령, 보수적 성향의 문 대통령, 그 사이 어딘가에 자주적 외교정책의 '선'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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