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여기까지 읽으셨습니다"

[the 300][광화문]

여야에서 개헌논의가 일자 대통령은 개헌논의가 '경제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휴대폰에 갇혀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블랙홀은 휴대폰이다.

 

                                     

 휴대폰 보조금 내역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해 이른바 '호갱(어수룩한 고객)'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나온 '이동통신 단말

기 유통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법 시행 보름만에 개정 내지는 폐지 논의가 시작된 이 법안이 통과된 건 지난 5월2일. '식물국회'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국회는 여야 합의로 본회의에서 76개의 법안을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식물국회라는 오명은 잠시 면했지만 단통법 '입법 실패'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이다. 특히 지난해 정기국회 이후 한 건의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해 '원조 식물'로 여겨졌던 미방위는 본회의 직전인 4월 30일 전체회의를 열어 130건이 넘는 법안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단통법은 215명의 의원이 표결에 참여, 213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상민 최민희 단 두 의원만이 기권했다. 단통법 관할 상임위원회인 미래창조과회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으로서, 여야 합의사항에 대해 기권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그는 논란이 되고 있는 보조금 분리공시를 의무화하는 개정안을 14일 발의했다.)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인데 법안을 꼼꼼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벼락치기' 통과를 위해 법안소위, 상임위 전체회의가 새벽까지 이어지고, 100개가 넘는 법안들이 논의되는 와중에 최종 법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 수도 없으면서 차마 찬성할 수 없어서 기권했다는 것이다.


법 통과 이전 단통법이 '논의'된 것은 지난해 12월23일 미방위 법안소위원회가 전부다. 그나마 여야 대립으로 회의에는 여당 의원들과 정부관계자들만 참석했다. 발언을 대표발의한 조해진의원을 비롯, 속기록에 나타난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언은 보조금 분리 공시가 시행될 경우 삼성전자 등 제조회사의 영업비밀이 새 나갈 수 있다는 우려에만 맞춰졌다. 공동발의한 9명 의원(권은희 김성찬 김영우 김태원 김한표 남경필 안덕수 이우현 조해진 홍지만)중 한명인 권은희 의원조차 나중에 국정감사장에서 "이렇게 파장이 클지 몰랐다"며 단통법 시행 이후 체감 통신비가 오히려 늘었다는 비판을 이어갔다.


15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9명(김경협 김기식 김영환 박수현 박홍근 백재현 송호창 신기남 안규백 우상호 유은혜 윤관석 이개호 이목희 정호준 최민희)이 '가계통신비 인하를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발족했다. 하지만 단통법 개정을 목표로 하는 이들 중 10명(김기식 박수현 박홍근 백재현 송호창 신기남 안규백 우상호 윤관석 정호준)은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다. 사과라도 한마디 하고 활동을 시작하는게 맞아 보인다.
이쯤 해서 의원들이 평소에 법안을 단 한번이라도 읽어보는지 의문이 든다.
공동 발의한 의원들은 발의서에 도장을 찍게 돼 있으니 최소한 이들은 법안 내용을 잘 알고 있으려니 생각이 되는데, 그것도 아닌듯 하다. 권성동 의원(새누리당)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공동 발의자였던 새누리당 강기윤 의원의 경우 며칠전 "나는 법안 내용을 몰랐다"며 공동발의를 철회하기도 했다.
 
 본회의장 의원석에 놓인 단말기에는 법안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지만, 본회의장에서 그걸 읽어보는 의원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전검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는 상대방이 읽었는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다. 러시아 메신저 텔레그램은 상대방이 몇시에 읽었는지, 최종 접속시간이 언제인지까지 나온다.
 
국회를 통과하는 법안들이 하나 같이 직간접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고 보면, 법안마다 '읽음' 표시 기능 하나쯤은 집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표결 전에 의원이 한번이라도 읽었는지를 국민들이 검열하게 하면 '제2의 단통법' 사태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을까.
단통법은 명백히 '입법실패'이고, 이로 인한 금전적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클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만 돌을 던지려니 찜찜하다. 시장 실패에는 정부가 개입하면 된다지만 국회와 정부가 합작해낸 입법실패는 유권자와 미디어밖엔 개입할 주체가 없다.
 
입법과정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지 않으면 이런 '입법비용'을 우리가 또 치러야 한다는 걸 유권자와 미디어가 실감했다면, 그래도 중요한 거 하나는 건진 거라고 위안을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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