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오전10시 서명하고 12시간 더싸운 이유

[the300][런치리포트-정전협정 66주년]②예상못한 2년 협상..막전막후

해당 기사는 2019-07-30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유엔군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국가기록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한국전쟁 정전(휴전) 협정이 서명됐다. 실제 한반도에 총성이 멈춘 건 12시간 후인 밤 10시. 그 사이에도 남북은 치열한 폭격과 포격을 주고 받았다. 왜 12시간을 기다린 걸까.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그날의 모습이 남아있다.

오전 10시 나무로 만들어진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 양쪽 입구로 휴전협정 서명 대표들이 입장했다. 동측 출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중장 일행이 서측 입구로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 일행이 들어와 앉았다. 

이들은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총 9통에 서명했다. 양측 대표들은 악수도 인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들었다. 서명을 마친 양측 수석대표들은 입을 열지 않은 채 퇴장했다. 입장부터 퇴장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2분. 끝난 게 아니었다. 최종 결재권자들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3시간 후인 오후 1시 유엔기지내 문산극장에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한국군 대표 최덕신 소장 등이 임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확인서명을 했다. 공산군 측에선 김일성이 이날 오후 10시에 평양에서 서명했다. 총성을 멈추기로 정한 시각이다.

중국 인민지원군 팽덕회 사령원(사령관)은 다음날 오전 9시 30분 개성에서 서명했다. 정전조인 절차의 마지막이다. 3년 1개월, 즉 1129일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이 비로소 멈췄다. 

휴전 협상 자체는 개시후 2년, 본회의 159회를 포함한 765번의 긴 회담이 필요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첫 회담이 시작될 때만해도 휴전협정 체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걸로 예상하지 못했다.

첫 고비는 사실상 첫 의제인 군사분계선 결정이었다. 공산군은 전쟁 전의 분계선인 38선을, 전력이 우세했던 유엔군은 그보다 북쪽을 제시했다. 분계선이 결정되면 전투를 중단하기 바랐던 공산군과 ‘전투 계속 원칙’을 고수한 유엔군의 이견도 논점이었다. 

군사분계선 협상은 그해 11월 23일 끝났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설정이 합의됐다. 유엔군은 이 때만해도 한 달 정도만 더하면 휴전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포로 문제가 복병이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가장 처음 제시한 포로 명단의 격차가 컸다. 유엔군은 약 13만2000명, 공산군은 약 1만1500명의 포로 명단을 제시했고 유엔군이 일대일 교환 원칙을 내세우자 공산군 측은 거부했다. 그러자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만 돌려보내자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번엔 포로 송환 규모가 체제 선전 도구로 비화했다. 송환을 거부할수록 상대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협상과정에서 공산군 내 이견도 커졌다. 유엔군 제시 송환 거부 포로 중 중국군 출신이 1만4074명이었는데 이중 대다수가 대만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휴전회담을 주도하던 중국은 포로 송환에 비타협적으로 돌아섰다. 유엔군 폭격으로 피해가 막대했던 북한은 수용을 원했지만 중국이 반대했고, 휴전에 부정적이던 스탈린도 중국 편을 들며 협상은 표류했다.

포로 문제에 막혀 교착에 빠졌던 휴전회담은 1952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한국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변곡점을 맞는다. 소련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자 내부 정비에 집중해야 했던 소련도 휴전에 찬성하게 된다. 

1951년 12월 시작한 포로 송환협상만 1년6개월이 걸렸다. 그 기간 수많은 인명이 포화 속에 사라졌다. 전쟁후 남북 사이에는 민족의 동질감 대신 증오와 원한이 남았다.
 
북한 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 측이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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