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엔 부담 野엔 기회…'해임건의안'

[the300][런치리포트-야당의 필살기, 국무위원 해임건의안]①역대 6명 가결, 정국 격동

해당 기사는 2019-07-25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은 야당에 주어진 무기다. 성공하면 강력한 리더십을 인정받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 반면 여권에는 큰 위협이다. 해임건의안 통과는 대통령에 대한 신임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공동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방탄국회’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정경두 국방부 장관(국무위원)의 해임건의안 표결을 막는 이유다. 

◇14대 국회, 국무위원 전원에 해임건의안 제출 =헌법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발의와 과반수의 찬성으로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해임건의를 할 수 있는 사유를 법에서 따로 정하지는 않는다. 통상 국무위원들이 직무를 집행함에 있어 헌법을 위반했거나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있는 경우에 해임 결의안을 제출한다. 

또 정책의 수립이나 집행에 있어서 중대한 과실을 범했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을 잘못 보좌했다고 판단될 경우에도 국회는 해임결의안을 제출한다. 

역대 국무총리와 장관 등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사례는 단 6번뿐이다. 전체 164건의 해임건의안이 발의됐으니 통과율은 3.7%다.

해임건의안이 가장 많이 발의된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다.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 책임론이 온 나라를 휘감은 1994년 한 해에만 총 45건의 해임건의안이 발의됐다. 그해 4월에는 국무총리를 제외한 22명의 국무위원 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제출됐다. 같은해 10월 국무총리를 포함한 23명의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발의됐다. 

1994년 4월에 발의한 해임건의안 22건은 표결에 부치지 못하고 폐기됐다. 10월에 발의한 해임건의안은 표결에 부쳤으나 모두 부결됐다. 

해임건의안이 발의되면 국회의장은 안건이 발의된 후 처음 개의하는 본회의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본회의에 보고된 때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무기명 투표로 표결해야 한다. 이 기간 내에 표결하지 아니한 해임건의안은 폐기된 것으로 본다.

◇공동정권도 붕괴시킨 ‘해임건의안’ =현행법에 따르면 해임건의안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부할 경우 입법부를 무시했다는 정치적 부담을 고스란히 대통령이 떠안아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랬다. 2016년 9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대통령은 수용 거부 입장을 천명했다.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가 터지면서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 DJP연합(김대중-김종필 연합)을 깬 결정적 계기도 당시 임동원 통일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가결이다. 2001년 8·15 민간 방북단의 친북 활동이 문제가 돼 야당인 한나라당은 임 장관의 교체를 요구했다.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보수 성향이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이 사건으로 새천년민주당-자민련의 공동정권은 3년 7개월 만에 붕괴됐고 ‘여소야대’정국으로 바뀌게 됐다.

노무현 정부에선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국회 재적 과반(137석)보다 많은 149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손쉽게 통과될 수 있었다. 김재수 장관이 해임건의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킨 것과 달리 김두관·임동원 장관은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자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다.



◇스타 정치인 탄생의 계기 = 최초로 해임건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은 것은 이승만 정부 때 임철호 농림부 장관의 사례다. 3대 국회 때 야당은 1955년 7월 쌀값 폭등과 부실 대책의 책임을 물어 해임건의안을 제출했다. 

당시 해임건의안은 김영삼이라는 ‘스타 정치인’을 탄생시켰다. 28세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주목받던 김 의원은 “우리 국회가 생긴 후에 개별적인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옛말에 일벌백계란 말이 있다. 이번 기회에 책임 없는 행정을 하는 모든 국무위원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우리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고 정부의 잘못을 규탄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군사 독재 시절에도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예가 있다. 여당 의원들의 ‘반란표’가 통과에 힘을 보탰다.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제출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 40여명이 당론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졌다. 이른바 ‘4.8항명파동’이다. 

권 장관의 해임건의안도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의원이 주도했다. 당시 헌법에는 ‘해임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돼 있어 권오병 장관은 해임됐다.

1971년 오치성 내무무 장관 해임안도 여권 내 파워게임으로 여당표가 이탈하면서 통과됐다. 당시 신민당이 제출한 오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오 장관과 알력관계에 있던 김성곤 공화당 의원 세력 20명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안건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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