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평양, 적대적 공존에서 호혜적 연결로

[the300][남북이 연결된다]<3>연결의 역사-③ 660번 대화했지만 제도화 못해

해당 기사는 2018-09-12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1997년 대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정치권은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위해 '북풍'을 바랐던 걸로 드러났다. 암호명 '흑금성'으로 활동하던 대북 비밀 공작원을 활용했다. 북한에 무력시위를 제안했다. 흑금성은 이를 폭로했다. '총풍(銃風) 사건'이다. 그는 북한 지도부도 대선개입 의지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흑금성은 20년간 공작원 경력 끝에 '이중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다.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영화 '공작'은 흑금성 박채서씨의 이야기다. 한반도 평화가 급물살을 타는 2018년에 개봉해 두 시대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남과 북의 적대적 공존이다. 남북은 1971년부터 대화의 물꼬를 텄지만 신뢰는 부족했다. 단절돼 있는 편이 '정치적 계산기'를 두들기기에 좋았다. 남북은 이제라도 신뢰를 쌓으면서 교류의 제도화에 나서고, 다방면의 연결을 심화해야만 그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평양에서 만나 발표한 '6·15 남북 공동선언'은 민족 통일의 당위성에서 한 단계 나아가 방향을 제안했다. 남측의 남북연합 구상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점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공동선언)을 도출했다. 경제협력, 인도주의적 지원, 관광, 문화, 과확, 체육, 예술 등 다방면의 교류를 약속하며 '연결고리'를 잡은 듯했다.

하지만 제도화는 쉽지 않았다. 정권이 교체되면 손바닥 뒤집듯 상황도 바뀌었다. 국회 비준동의 절차는 여야 이견으로 종종 제동이 걸렸다. 2007년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총리 회담에서 경제특구 조성을 합의했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국회 비준은 불발됐다. 2009년 천안함 폭침이 일어났다. 정부는 강력대응 차원에서 5·24조치를 발동, 남북교류를 묶었다. 박근혜정부에선 개성공단 가동마저 중단됐다.

남북 회담의 결과물을 제도화, 법제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뒤집어 보면 올해 남북관계가 이만큼 온 건 양 정상, 특히 문 대통령의 '개인기'에 의존한 측면이 크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 선언의 국회비준동의를 중시하는 이유다. 

이찬호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현재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로 국회 비준과 행정행위 등이 효력을 얻지만 이는 남한만 해당한다"며 "남북한 법령간 상호 연계성을 높이는 합의 법제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국민이 북한 방문을 하려면 통일부의 승인과 북한정부의 승인을 각각 받아야 한다. 경제사업, 교류협력 등을 위한 승인이나 인허가절차도 그렇다. 남북한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단일 법제를 논의해 '연결'의 불확실성을 낮춰야 한다는 조언이다.

2007년을 끝으로 중단된 남북 국회회담도 필요하다. 입법기관답게 단일법제 논의뿐 아니라 '통일헌법'을 고민하고 각종 비준동의안도 처리해야 한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로 연결되기 위해선 두 정상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국회차원의 의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2000년 1차 정상회담은 국내 지지기반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쟁화 됐고, 2007년 2차 정상회담은 시기가 너무 늦어 정권 교체로 동력을 상실했다"며 "지금은 여유가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라 말했다. 임 교수는 "남북뿐만 아니라 북미, 남북 대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며 "3각 바퀴가 잘 굴러가는 구조에서 희망과 낙관을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660번의 만남에도..연결 못했다= 남북은 분단 후 지금까지 660번 만났다. 회담은 정치분야가 267회로 가장 많았고, 인도주의회담 153회, 경제 132회, 사회문화 59회, 군사 49회 순이었다. 

남과북의 약속은 합의서로 기록을 남겼다. 지금껏 남과 북은 250건의 합의서를 체결했다.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등이 있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제정한 '7·4 남북 공동 성명'은 정권 유지의 불쏘시개가 됐다. 박정희는 이 성명을 구실로 10월 유신을 발표하고 독재했다. 북은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고 주체사상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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