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협, 애증의 69년史

[the300][2018남북정상회담]<4>-②40년의 '단절' 28년간의 '교류' …그 다음은?



남북한 경제협력은 애증의 역사를 지녔다. 1차·2차 정상회담을 통해 전향적인 경제 협력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북한의 핵개발과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로 관계 악화가 반복돼 왔다.

1945년 해방직후 남북의 교역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승 만정부가 들어선 후 1949년 4월 '남북교역정지에 관한 건'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남북경제교류는 완전히 중단됐다.

냉전시대를 지나 1980년대 말 전세계적으로 탈냉전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남북대화가 재개됐고 경제교류도 추진됐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간 교역의 조건없는 개방'을 내용으로 담은 '7·7 선언'을 성사시키며 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냈다. 1949년 남북 간 경제교류가 공식 단절된 지 약 40여년만이었다.

그러나 90년대의 남북경협은 일부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추진됐다. 1989년 초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을 통한 금강산공동개발 협의, 1992년의 대우그룹 남포공단 합작사업 승인 등이 이뤄졌다.

남북경협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을 치르며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6·15 공동선언 이후 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하면서 민간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협력에 정부가 중요 주체로 등장했다. 단순 교역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경제 협력사업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금강산관광·개성공단·경의선연결사업을 3축을 바탕으로 경협무드가 무르익으며 교역규모도 증가했다. 2002년에는 6억 달러를 달성하면서 남한이 중국에 이어 북한의 제2교역상대로 부상하게 됐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은 10·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구체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적시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개성공업지구 2단계 개발, 문산-봉동간 철도화물수송,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 이용,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 건설 등 다양한 합의를 성사시키며 경제협력-평화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석달 뒤 치러진 대선에서 보수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합의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경제협력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겠다는 대북정책을 표방했다. 이 가운데 2008년 7월에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터지며 10여년을 진행해온 금강산관광이 중단됐다.

남북이 냉각기를 갖는 가운데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대북 교류사업 자체를 전면 중단하고 대북 투자 사업도 보류하는 5·24조치를 발표했다. 그해 11월 북한은 연평도 포격으로 도발하며 대북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고 남북경협도 설 곳이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는 북한의 거듭되는 핵 도발에 맞서 대북 강경책을 유지했다. 2013년 4월 키 리졸브 훈련을 두고 북한과 마찰을 겪은 정부는 개성공단에서 철수했다가 재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 조치로 2016년 2월 결국 폐쇄가 결정됐다. 개성공단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남북경협의 최후의 보루였던 개성공단이 닫히면서 남북교류 또한 끊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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