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열었던 1990년대는 정치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삼김(三金)시대'로 상징되는 '보스 정치'가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정치인은 이른바 '지도자'였다. 국정을 이끄는 대통령은 물론 마을 조합의 장 자리 하나까지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 당연하게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에 대한 정치인의 우월적 위치와 인식 덕이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신념과 소신, 가치관 등을 정치 인생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 중요할 뿐 정치인의 전문성이나 실적 등은 사소하게 치부되곤 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 정치인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국민들에게 정치인은 '지도자'는 커녕 끊임없이 감시하고 확인해야 하는 애물단지다. '직접 민주주의' 요소의 강화로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논의하는 정치인들은 고유 영역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에겐 '정치 지도자'가 아닌 새로운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보다 다층적으로 대변하고 풀어내주는 한편 합리적인 갈등 조정자로서 보다 확실한 전문성을 요구받는 정치전문가, 전문가 정치가 '3만달러 시대'의 정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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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19회 백봉신사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을 비롯한 수상자 및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
지난해 말 국회에선 '조용한 이변'이 일어났다. 한해 동안 가장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백봉신사상' 대상에 이례적으로 초선 국회의원이 선정된 것이다. 그동안 백봉신사상 수상 명단에는 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들의 이름이 올랐다. 정치인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뽑다보니 아무래도 당대표나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나 대선주자들이 단골 수상자가 된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동안 대상 선정과 완전히 다른 흐름을 보였다. 국회의원이 된 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은 초선에 당 지도부도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선주자로 영입된 '깜짝스타'도 아니다. 이 경우 기존 정치권 상식으론 초선 국회의원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했다.
박주민 의원은 정치인이 지도부도, 대선주자도 되지 않고도 정치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박 의원만이 아니다. 20대 국회에서는 유독 초선 국회의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더불어민주당의 금태섭, 조응천, 표창원, 이철희 의원, 자유한국당의 전희경 의원 등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전부터 정치권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초선 국회의원이 되고 난 이후에는 중진 국회의원 못지 않은 주목도와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확고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부터 공적 이슈에 그 전문성을 활용하며 정치적 경력을 쌓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양한 정치적 이슈를 통해 정치인 못지 않게 정치적 자질을 검증받아왔다는 점도 달라진 점이다. 정당의 검증에 앞서 일차적으로 국민들의 검증을 직접 거친 셈이다.
정치 영역으로 들어선 후에도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전문성에 기반해 정치 활동을 한다. 이는 자연히 정치권 입문 이전의 경력과 이어지면서 정치 궤적의 연결성과 일관성을 완성한다. 정치인이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수단인 '스토리'의 힘도 여기서 생긴다. 나아가 진정성까지 더해진다.
"초선 국회의원이 이름을 알리고 세를 얻을 때까지 계파에 기대고 보스에 충성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가 아닌, 정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선 국회의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가뜩이나 '국회의원=기득권'이란 시각이 강하다보니 타파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국회의원이 경험이나 경륜을 통해 축적할 수 있는 전문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발의된 '다선 방지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이다. 국회의원의 연임을 3선까지 제한하는 내용의 이 법안은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 등 10명의 초선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이 의원은 "능력 있는 정치신인들에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는 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다"며 제안 취지를 설명했다. 실제로 이 의원이 국회 입성한 20대 총선에서 3선 이상 국회의원 66명중 51명이 당선이 됐다. 당선확률은 77%다.
다선금지법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다. 국회의원의 막강한 권력에 시간이 쌓이면 기득권이 공고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깊어서다. 실제로 최근 불거진 공공기관·금융권 채용비리를 비롯해 당내 정쟁에 휘말리는 의원들은 주로 다선의원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총선을 앞두고 다선의원을 대상으로 한 '공천 물갈이'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구태 정치'를 끊어내겠다는 민심의 준엄한 명령인 셈이다.
다선 의원들이 이른바 '밥값'을 못한다는 것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하는 현실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예전엔 '큰 정치'라고 해서 세를 거느리고 법안 만드는 것은 정치로 취급안하는 문화였는데 지금 다선 의원들은 '큰 정치'도 못하고 그렇다고 입법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어서 역할이 애매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비단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마크롱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에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치 개혁의 대표적인 과제로 '공직자 및 국회의원 3연임 제한'을 대선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까지 근래 전세계적으로 국가 수반에 오른 정치인들이 비교적 짧은 정치 경력을 지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 정치 역시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복잡하게 펼쳐지는 시대에는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치 경력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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