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자칭' 보수의 배신

[the300]

대한민국 ‘자칭’ 보수의 키워드는 ‘배신’인 듯 하다. ‘배신’의 저작권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2008년 총선을 앞둔 시점, 공천 과정에서 박근혜는 한마디를 던진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배신 당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공천을 주도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여당의 핵심 인사들은 ‘속인 사람’이 됐다. 보수층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 된 쪽으로부터 멀어졌다. 배신의 피해자는 당당히 돌아왔다. 서청원(친박연대), 김무성(친박무소속)은 그렇게 생존했다.

 

‘배신’이란 단어가 직접 언급된 것은 2015년 여름이다. 6월 2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박근혜는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유승민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대통령이 집권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유승민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그 말을 전해들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칼로 찌른 아픔을 느꼈다”. 그 역시 박근혜의 발언을 ‘배신’으로 느꼈다는 얘기다.

 

‘박근혜 탄핵’을 두고도 배신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탄핵에 찬성한 구여권 인사들을 보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시선이다. ‘탈당→창당→복당’의 길을 걸은 그들을 지켜보는 한국당 소속 의원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한 재선의원은 “배신의 상처는 쉽게 여물지 않는다”고 했다. 대구에 지역구를 둔 의원은 덧붙인다. “참긴 참겠지만, 집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에게 안방까지 내 줘야 한다는 것인지…”. 광야에 남은 이들도 배신을 말한다. 박근혜가 유승민을 배신자로 낙인찍을 때 당 대표였던 김무성은 유승민을 한번 더 버리고 한국당으로 돌아갔다.

 

‘자칭’ 보수는 이렇게 뉴스에 다시 등장한다. 외면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현장의 보고가 들어온다. 친했던 A의원과 B의원이 소원해진 배경, 친박 핵심으로 불렸던 C의원이 잠잠해진 이유 등이 전해진다. 그냥 배신과 갈등의 연속일 뿐이다. 콘텐츠는 없다. 오히려 씨앗으로 존재하는 듯 했던 ‘보수 개혁’ ‘새로운 보수’의 외침마저 사라진다.

 

‘자칭’ 보수가 내건 대연합의 명분은 ‘폭주기관차 제동’, 이른바 반문(반문재인) 집결이다. 보수층의 허탈감을 노린 공략인데 얄팍하다. 현 정부에 대한 우려, 보수층 분열에 대한 걱정이 적잖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수층이 바라는 것과 ‘자칭’ 보수가 하려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박근혜 출당’을 보수 혁신, 적폐 청산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자칭 보수’뿐이다. 보수층은 더 근본적 혁신을 바란다. 지금의 ‘자칭 보수’로는 반문이나, 여당 견제나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개혁 성향의 한국당 의원은 답답함을 토로한다. 한국당 내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데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구름은 이명박 박근혜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 자리를 ‘자칭’ 보수를 말하는 중진들이 대신하고 짓누르고 있다. 솔직히 민주당이 살아난 것도 답답했던 구름이 사라진 때문 아닌가”. ‘보수’라는 이름으로 뭉쳐도 결국 계파 재편, 대결 재현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혁신은 설 곳이 없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총리가 저서 ‘보수의 유언’에 남긴 명언이 있다. “보수는 불역(不易)과 유행(流行)이란 말이 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있으면서 때로는 발전과 전개(유행)를 해서 갱신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보수의 본류다.” 보수는 물론 정치권 인사라면 숱하게 들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보수는 어떤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개혁하고 있는지 ‘자칭’ 보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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