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배출한 민정수석실…무소불위 '칼질'에 적폐전락

[the300][런치리포트-청와대 사용설명서](3) 민정수석실 ② 키워드는 '검찰'

해당 기사는 2017-09-12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런치리포트 매거진 보기
/사진제공=조선일보

지난해 11월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11층 조사실. '최순실 게이트'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출두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여유있게 웃고 있고 후배 검사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서있는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왜 정권들이 '청와대 왕(王)수석' 민정수석을 검찰 고위직 출신으로 선임해왔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역대 청와대 민정수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검찰'이다. 검찰 고위직 출신들을 민정수석에 기용하면 청와대가 사정(司正)기관을 틀어쥐고 원만한 통치를 해나갈 수 있는 계산이었다. 2000년대 이후 민정수석 중 비검찰 출신은 5명(문재인 2번, 전해철·이호철·조국)으로 전체 19명의 26%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검사 출신이 중용되지는 않았다. 첫 민정수석은 박정희 정부 시절 정치인인 유승원 전 의원이었다. 전두환 정부 때는 이학봉·김용갑 등 군 출신 최측근들을 중용했다. 당시만 해도 사정 기능을 담당하는 사정수석이 따로 있어 민정수석은 대통령의 법률보좌와 인사검증 등을 주로 담당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서야 한영석·김영일 등 검찰 출신들이 민정수석에 기용되기 시작한다. 검찰의 사회 각층 장악력이 군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영삼 정부들어 사정업무를 민정수석에 통합시키면서 민정수석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김영수 ·문종수 두 명의 검찰 출신이 민정수석에 이름을 올렸다. 민정수석실의 역할과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김영삼 정부를 이은 김대중 정부는 문제의식을 느꼈다. 검찰과 같은 사정기관을 청와대가 주무르는 것이 적절한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에 민정수석실을 아예 폐지하고 민정비서관과 법무비서관을 비서실장 직속에 배치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하지만 김대중 정권 2년차인 1999년 민정수석실은 다시 부활한다. 민의수렴이 원활하지 않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정기관 장악의 필요성이 실체적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광옥·김학재·이재신 등 검찰 고위직 출신들이 김대중 정부의 민정수석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과 같은 문제의식을 안고 출발했다. 이에 민정수석실을 유지하되 주로 비검찰 출신을 기용하며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정권이 사정의 칼날을 휘두른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은 최측근에게 민정수석 자리를 줘 인사검증 및 법률자문 등의 역할을 하게 했다.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왕수석'으로 불린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민정수석을 두 차례나 역임한 점에서 이같은 특성이 잘 드러난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인권변호사 출신이고, 이호철 전 수석은 아예 비법조인 출신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들어서는 민정수석 10명이 전원 검사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종찬·정동기·권재진·정진영, 박근혜 정부에서 곽상도·홍경식·김영한·우병우·최재경·조대환 전 수석이 활약했다. 힘있는 검사 출신의 민정수석들이 줄줄이 배치되며 청와대의 사정기관 장악력도 높아졌지만, 검찰의 독립성이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도 함께 따라왔다.

 

민정수석실의 힘이 막강해지자 세간에서 대표적인 '적폐'로 간주되기도 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전초전 격인 '정윤회 문건 사건'의 경우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과 민정수석실 간 주도권 다툼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있다. 우병우 전 수석의 경우 검찰에 '우병우 라인'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왕수석으로 활약했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정권이 몰락한 후에는 법정을 드나들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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