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대선주자 사용설명서-심상정

[the300]종합

경제관료·정치인도 '벌벌'…변화의 중심에 심상정이 있었다


2007년 10월. 대부업 법정 최고이자율이 49%로 낮아졌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정 최고 이자율이 25%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아 보이지만 2002년전까지는 최고 이자율 상한선 자체가 없었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이후 사채시장의 이자는 연리 200%가 넘기도 했다. 법정최고이자율을 49%까지 낮춘 1등 공신이 바로 심상정 정의당 대표였다.

 

심 대표는 당시 “대다수 국가에서 시중 금리의 두 배를 넘지 않도록 정하고 있지만 연착륙을 위해 40%로 낮추는 안을 내놨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정치권을 중심으로 법정최고이자율을 20%까지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대부업체가 다 망할 것‘이라고 정부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법안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크고 작은 변화의 선두에는 진보정당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심상정이 서 있었다. 

 

◇대한민국 변화의 선두에는 그가 있었다 = 그는 원내 입성 첫 해부터 ‘실력있는 정치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서민의 대변자로서 정책과 예산배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재정경제위원회를 선택하면서다. 심 대표 자신도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그는 실물경제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2004년 첫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파생상품 시장을 통한 외환개입으로 1조8000억원대 손해를 초래했음을 밝혀내면서 이헌재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제압했다. 그후 그는 공무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정치인이 됐다. 업무보고가 있거나 국정감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공무원들이 “심 의원님 질의서 못 구하면 저 잘린다”며 그의 질의서를 미리 입수하기 위해 의원실 앞에서 밤샘을 하곤 했다.

 

심 대표는 이후 국회 의원전용엘리베이터 폐지, 철도무임승차권 등 의원특권을 없앴고 불법 정치자금에 세금을 물리도록 했다. 모든 정부지출에 성차별을 배제하는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성인지 예산’도 제도화했다. 이제는 당연시된 무상급식, 근로시간단축 등의 의제를 사회에 끊임없이 던진 것도 심 대표가 속한 정당이었다.

 

이것이 심 의원이 25년 노동운동을 접고 제도권 정치로 뛰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심 대표는 “구로공단을 거쳐 민주노총 금속노조까지 조직의 정점에서 활동해도 정책과 예산배분 결정력을 가지는 국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한국사회의 실질적 변화에 기여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설명했다.

 

◇진보정치의 실패와 반성 그리고 선거구제 개편 = 그러나 너무 많이 앞서갔던 탓일까. 정의당을 대표로하는 진보정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를 느꼈다. 정의당의 지지율은 5~7% 수준이다. 노동자·서민을 위한 정당을 표방하고 지만 정작 정의당은 이들의 대안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국민에게 진보정당은 아직 운동권 티를 벗지 못한 비판세력에 불과할 뿐이었다. 2002년 대선 사례가 대표적이다.  민주노총 구성원의 47%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고 36%만이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심 대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국민들은 당장 정권을 맡겨 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정치세력을 수구보수세력과 민주개혁세력 둘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의 정치를 자임했지만 아직 일하는 사람의 희망과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심 대표의 고민이다. 심 대표는 그래서 2013년 6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진보정치의 실패를 고백하는 반성문을 썼다. 추억에 잠긴 진보 대신 미래를 여는 진보로, 싸우는 진보에서 밥 먹여 주는 진보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심 대표는 진보정당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체 반성도 필요하지만 제도개혁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정의당 지지율을 7%라고 본다면 국회의원 300석 중에 21석을 차지해야 하지만 현재 정의당 의석수는 6석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정당지지율에 비례해 의석수를 보장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은 그와 진보정당의 오랜 숙원이다. 또 결선투표제를 도입한다면 국민들의 ‘사표방지 심리’를 막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심상정, 진보정치 실패 딛고 대선까지 뛴다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 모르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북조선인민공화국의 림계진(이범수 분)이 남한으로 배신한 장학수(이정재 분)를 향해 던진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적어도 심상정 정의당 대표에게는. ‘노동 운동 외길을 걸어온 여성정치인’ ‘투철한 이념 지향적 인물’로 비춰지는 심 대표는 “이념 갖고 25년 반평생을 어떻게 살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생각해보니 그 일을 하는 게 행복했다. 만약 이념만을 좇았다면 이 길을 일찍 벗어났을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심 대표는 “국민의 실질적 변화에 기여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정의당이 종북주의와 결별을 선언하고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강령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보의 가치를 소중히 이어가지만 내 정서에 국민의 일반적인 생각을 억지로 꿰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이상과 국민정서간의 괴리를 좁히는 것, 이 교훈은 지난 14년간의 진보정치 실패를 통해 더 강화됐다.  

 

◇‘제1의 국정과제는 ’노동‘ = 심 대표의 대선 슬로건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다. 아직 공식 슬로건으로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노동개혁을 통해 새로운 삶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구호라는 게 캠프의 설명이다. 민심을 읽으면서 정의당의 핵심가치를 추구한다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양극화가 화두가 된 지금 국민월급 300만원 시대와 비정규직없는 사회, 재벌개혁이라는 공약을 내세웠다. “누구나 일을 해서 자기를 실현하고 노동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을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심 대표는 설명한다. 노동관련 부처를 부총리급으로 격상하겠다는 방안도 내세웠다.

 

◇"나를 더이상 '슈퍼맘'으로 부르지 마라" =육아휴직 기간을 현행 90일에서 120일로 확대하고 배우자의 출산휴가를 유급 3일에서 39일로 늘이는 공약도 제시했다. 육아휴직 급여 통상임금도 40%에서 60%로 인상할 계획이다. 이른바 ‘슈퍼우먼 방지법’이다. “결혼하고 아이엄마가 된 후 여성들이 ‘슈퍼우먼’ 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감내해야할 짐이 무거운지를 절감했다”는 평소 그의 소신과 철학이 담긴 공약이다. 그는 “슈퍼우먼이란 말은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들을 여성 개인의 능력으로 치환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그밖에 복지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하는 사회복지세신설, 2040년까지 모든 원자력발전소 폐로 등도 공약했다.

 

◇"정치에서 양보는 미덕 아냐…반드시 대선 완주" = 심 대표는 대선 완주를 강조한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그는 선거 20여일을 앞두고 문재인 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한 뒤 사퇴했다. 그는 지난 대선에 대해 “양보는 포장된 패배”라며 “이길 수 있는데 양보하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했다. 야권분열로 인한 표의 분산을 막기 위해 감내한 희생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그는 “이번 대선은 촛불시민, 알바생, 워킹맘들이 나에게 달리라고 주문하고 있다”며 “어떤 경우에도 사퇴하는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또 “사퇴하면 후보자만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자와 소속정당도 퇴장한다”며 당원과 지지자들을 위해서 반드시 완주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발랄했던 교사 지망생에서 노동운동 '철의 여인'으로


"운동권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찍은 남자들은 죄다 운동권이었다. 그래서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발랄했던 대가족의 막내, 역사 선생님을 꿈꾸던 사범대생에서 가명으로 위장취업한 구로공단 미싱사, 그리고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리더에서 대선 후보까지.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인생은 수배와 투쟁의 연속이었다.

 

◇ 대가족의 막내, '전태일 평전' 품에 안고 노동운동의 길로 = 심 대표는 오빠 둘, 언니 하나, 그리고 다섯명의 고모를 둔 대가족의 귀염둥이었다. 중학생 시절 열혈 야구팬이었고, 고등학생 시절엔 탁구장, 볼링장을 쏘다녔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내일은 또 어떤 재밌는 일을 만들어 볼지를 고민하던 시기"라고 썼다. 1978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행복한 시기였다. 긴 생머리에 짧은 스커트, "7cm 이하 구두를 신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멋을 부렸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전태일을 만났다. 정확히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도 10여년 전 분신한 그의 얘기를 다룬 '전태일 평전'을 만난 뒤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태일 평전을 "내 인생의 진로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표현했다. 

 

심 대표는 구로공단으로 달려가 미싱사로 위장취업했다. 10년이 넘게 그녀를 괴롭혔던 가명 '김혜란'도 그때 정했다. 하루 13시간 일하고 8만원의 월급을 받는 여공들의 삶을 보고 '역사 선생님'을 꿈꿨던 심 대표의 삶은 막을 내렸다. 그는 "이들이 제대로 존중받는 것이 진짜 민주화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편을 잡지는 못했지만, 노동운동 현장에서 강사가 됐다. 낮에는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고, 밤에는 노조를 조직하고 노조원들의 교육을 맡았다. 1984년부터 노조결성 및 쟁의 혐의로 수배가 시작됐다.

 

1985년에는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일주일 만에 끝난 파업은 44명의 구속과 1000명의 해고를 가져왔다. 가까스로 구속을 피한 심 대표에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까지 걸렸다. 심 대표는 "파업 닷새쯤 되던 날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보던 중 화면에서 '1계급 특진, 현상금 5백만원'이 걸린 내 얼굴을 봤다. 그것은 내가 언론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었다"고 했다. 당시 가명 '김혜란'에 걸린 혐의만 11개를 헤아렸다.

 

◇ 10년의 수배생활…노동운동史의 '철의 여인'으로 = 1993년 체포될 때까지 10년간의 지루한 수배생활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노동운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직 없이는 운동이 어렵다고 판단, 기업단위 노조를 뛰어넘는 대중 정치 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 창립에 함께했다.

이때 심 대표를 이끌었던 이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이다. 심 대표에 앞서 노동현장에 투신, 심 대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했고 각각 서노련 지도위원와 투쟁국장으로 함께했다. 심 대표와 김 전 지사는 각별했다. 

 

체포된 김 지사가 '심상정의 행방을 대라'는 가혹한 전기고문에도 묵묵부답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심 대표의 부군 이승배 사단법인 마을학원 이사장을 소개시켜준 것 역시 김 지사다. 그러나 이 둘은 심 대표가 최근 한 방송에서 "전설이자, 운동권 황태자, 하늘같은 선배였던 김문수와 지금의 그를 연계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서노련 와해 후 심 대표는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창립에 함께하고 쟁의국장과 조직국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창립일 하루 전 심 대표는 경찰에 연행돼 재판을 받게 됐다. 결과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집행유예가 만료된 1995년 11월부터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창립에 함께했다. 1996년부터는 산하 조직인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활동한다. 2003년 전국금속노동조합이 대한민국 최초로 노동조건 개선 및 임금삭감없는 주 5일 근무제 합의에 성공하면서 이를 주도한 심 대표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정계 입문, 그리고 '절반은 실패'였던 심상정의 정치= 심 대표는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초선 시절부터 국회 예결산특별위원회, 한미FTA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발군의 실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2005년에는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조차 난색을 표했던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을 내놓으며 격론 끝에 이를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심 대표는 정치 입문 4여년 만에 2007년 대선에 출마한다. 당내 경선에서 오랜 동지이자 경쟁자인 노회찬 후보를 꺾는 데 성공하지만, 권영길 후보에 밀려 끝내 출마가 좌절됐다. 

 

대선 패배 후 심 대표는 파국으로 치닫는 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해 수습에 나서지만 결국 실패,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진보신당 창당 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낙선했다. 2010년에는 경기도지사에 출마했지만,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이후 진보대통합 과정을 거쳐 2012년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19대 총선에 출마, 당선돼 국회에 다시 입성한다. 그러나 또다시 통합진보당이 부정 경선 사태 등으로 내홍을 겪자 탈당, 정의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야권 단일화 차원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또 한 번 후보 등록을 포기한다.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활동하다가 2015년 7월, 정의당 대표에 선출된다. 2016년 4월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 득표를 받으며 진보정당 최초의 3선 중진 의원으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진보 정당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심 대표는 "정치인 심상정의 인생 절반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언제나 양보해온 탓이다.

 

그래서 심 대표는 이번 대선만큼은 완주한다는 각오다. "선거 때마다 완주냐, 사퇴냐 묻는 정치관행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라고 중도 사퇴 가능성을 일축했다. 다시 한 번 '철의 여인'이 등장했다.



'당이 곧 캠프' 심상정의 사람들


정의당 대선후보인 심상정 대표는 선거캠프를 당 조직중심으로 꾸렸다. 노회찬 원내대표가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나경채 공동대표와 천호선 전 대표가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다.


비서실장에는 김종대 의원과 안창현 대표 비서실장이 맡아 일정등을 총괄한다. 김 의원은 김대중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안보분과 행정관, 노무현정부 인수위 국방전문위원을 거쳤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이정미 의원은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았다. 특보단장에는 신언직 심 대표의 정무수석보좌관이 맡았다. 조직1본부장에 윤소하 의원, 조직2본부장에는 김형택 부대표가 임명됐다. 조직1본부장은 16개 광역시도 선대위를 총괄하고 조직2본부장은 노동·농민·여성·청년·장애인·문예·성소수자선대본부를 총괄한다.

공보단장은 지난 20대 총선 당시 수원정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박원석 전 의원이 역할을 수행한다. 추혜선 당 대변인은 캠프의 수석대변인을 맡았다. 한창민 당대변인과 배진교 전 인천남동구청장도 대변인 역할을 맡아 언론대응과 홍보역할을 수행할 계호기이다. 

정책본부장에는 김용신 정책위의장, 홍보본부장에는 강상구 교육연수위 부위원장, 대외협력본부장에는 이병렬 부대표, 총괄본부장에는 이혁재 사무총장, 상황실장에는 김종민 부총장이 임명됐다. 김제남 전 의원은 탈핵생태특위원장을 맡아 원자력폐기정책 등을 총괄한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책자문단장을 맡아 심 대표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한다. 심 대표의 노동관련 정책도 손 교수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손 교수는 정의당 부설 정책연구소인 미래정치센터 이사장을 역임중이다. 법률지원단장은 김상하 변호사가 맡았다. 

정의당은 22일 선거대책위원회를 열어 이같은 내용을 확정했고 23일 공식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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