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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했던 교사 지망생에서 노동운동 '철의 여인'으로

[the300][대선주자사용설명서-심상정]③바이오그래피

해당 기사는 2017-03-23 런치리포트에 포함된 기사입니다 런치리포트 매거진 보기

"운동권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찍은 남자들은 죄다 운동권이었다. 그래서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발랄했던 대가족의 막내, 역사 선생님을 꿈꾸던 사범대생에서 가명으로 위장취업한 구로공단 미싱사, 그리고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리더에서 대선 후보까지.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인생은 수배와 투쟁의 연속이었다.

 

◇ 대가족의 막내, '전태일 평전' 품에 안고 노동운동의 길로 = 심 대표는 오빠 둘, 언니 하나, 그리고 다섯명의 고모를 둔 대가족의 귀염둥이었다. 중학생 시절 열혈 야구팬이었고, 고등학생 시절엔 탁구장, 볼링장을 쏘다녔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내일은 또 어떤 재밌는 일을 만들어 볼지를 고민하던 시기"라고 썼다. 1978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행복한 시기였다. 긴 생머리에 짧은 스커트, "7cm 이하 구두를 신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멋을 부렸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전태일을 만났다. 정확히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도 10여년 전 분신한 그의 얘기를 다룬 '전태일 평전'을 만난 뒤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태일 평전을 "내 인생의 진로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표현했다. 

 

심 대표는 구로공단으로 달려가 미싱사로 위장취업했다. 10년이 넘게 그녀를 괴롭혔던 가명 '김혜란'도 그때 정했다. 하루 13시간 일하고 8만원의 월급을 받는 여공들의 삶을 보고 '역사 선생님'을 꿈꿨던 심 대표의 삶은 막을 내렸다. 그는 "이들이 제대로 존중받는 것이 진짜 민주화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편을 잡지는 못했지만, 노동운동 현장에서 강사가 됐다. 낮에는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고, 밤에는 노조를 조직하고 노조원들의 교육을 맡았다. 1984년부터 노조결성 및 쟁의 혐의로 수배가 시작됐다.

 

1985년에는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일주일 만에 끝난 파업은 44명의 구속과 1000명의 해고를 가져왔다. 가까스로 구속을 피한 심 대표에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까지 걸렸다. 심 대표는 "파업 닷새쯤 되던 날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보던 중 화면에서 '1계급 특진, 현상금 5백만원'이 걸린 내 얼굴을 봤다. 그것은 내가 언론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었다"고 했다. 당시 가명 '김혜란'에 걸린 혐의만 11개를 헤아렸다.

 

◇ 10년의 수배생활…노동운동史의 '철의 여인'으로 = 1993년 체포될 때까지 10년간의 지루한 수배생활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노동운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직 없이는 운동이 어렵다고 판단, 기업단위 노조를 뛰어넘는 대중 정치 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 창립에 함께했다.

이때 심 대표를 이끌었던 이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이다. 심 대표에 앞서 노동현장에 투신, 심 대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했고 각각 서노련 지도위원와 투쟁국장으로 함께했다. 심 대표와 김 전 지사는 각별했다. 

 

체포된 김 지사가 '심상정의 행방을 대라'는 가혹한 전기고문에도 묵묵부답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심 대표의 부군 이승배 사단법인 마을학원 이사장을 소개시켜준 것 역시 김 지사다. 그러나 이 둘은 심 대표가 최근 한 방송에서 "전설이자, 운동권 황태자, 하늘같은 선배였던 김문수와 지금의 그를 연계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서노련 와해 후 심 대표는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창립에 함께하고 쟁의국장과 조직국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창립일 하루 전 심 대표는 경찰에 연행돼 재판을 받게 됐다. 결과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집행유예가 만료된 1995년 11월부터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창립에 함께했다. 1996년부터는 산하 조직인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활동한다. 2003년 전국금속노동조합이 대한민국 최초로 노동조건 개선 및 임금삭감없는 주 5일 근무제 합의에 성공하면서 이를 주도한 심 대표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정계 입문, 그리고 '절반은 실패'였던 심상정의 정치= 심 대표는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초선 시절부터 국회 예결산특별위원회, 한미FTA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발군의 실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2005년에는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조차 난색을 표했던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을 내놓으며 격론 끝에 이를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심 대표는 정치 입문 4여년 만에 2007년 대선에 출마한다. 당내 경선에서 오랜 동지이자 경쟁자인 노회찬 후보를 꺾는 데 성공하지만, 권영길 후보에 밀려 끝내 출마가 좌절됐다. 

 

대선 패배 후 심 대표는 파국으로 치닫는 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해 수습에 나서지만 결국 실패,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진보신당 창당 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낙선했다. 2010년에는 경기도지사에 출마했지만,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이후 진보대통합 과정을 거쳐 2012년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19대 총선에 출마, 당선돼 국회에 다시 입성한다. 그러나 또다시 통합진보당이 부정 경선 사태 등으로 내홍을 겪자 탈당, 정의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야권 단일화 차원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또 한 번 후보 등록을 포기한다.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활동하다가 2015년 7월, 정의당 대표에 선출된다. 2016년 4월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 득표를 받으며 진보정당 최초의 3선 중진 의원으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진보 정당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심 대표는 "정치인 심상정의 인생 절반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언제나 양보해온 탓이다.

 

그래서 심 대표는 이번 대선만큼은 완주한다는 각오다. "선거 때마다 완주냐, 사퇴냐 묻는 정치관행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라고 중도 사퇴 가능성을 일축했다. 다시 한 번 '철의 여인'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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