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당명 정치학

[the300]종합

'바른정당' 3공 이래 193번째 정당명…역대 최다는 '민주'


새누리당 탈탕파인 비박계가 정한 당명이 ‘바른 정당’이다. ‘바른정당’이 창당을 완료하면 3공화국 이래로 193번째 정당이 된다. 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금까지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마친 정당 후보들은 모두 13곳이다. 최근에 국민주권당과 모폴넷이 창준위를 등록했다. 이렇게 정당은 매년 우후준순처럼 탄생했다가 또 소멸한다. 

선관위가 만들어진 1963년부터 현재까지 등록한 정당 192개 중 정당명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민주'다. 모두 41번이 등장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1조 민주주의 원칙이 명시된 만큼 정당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다.

특히 김구, 신익희, 조병옥으로 출발한 민주당계가 즐겨 사용했다. ‘민주’라는 단어가 곧 민주계의 적통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에 반대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김영삼, 김대중 당시 총재가 만든 정당(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도 모두 '민주'를 당명에 포함시켰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전 당명이던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약칭인 '민주당' 사용 여부를 두고 김민석 전 의원 등이 주도한 민주당과 갈등을 빚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더불어민주당은 20대 국회에서 민주당을 흡수 통합했다.

민주는 야당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엔 민주공화당,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시절엔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존재했다.

보수진영 정당에서 자주 쓰인 단어는 '자유'와 '공화'다.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 자유당에 쓰인 '자유'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 세력인 민주자유당 때 재등장했다. 이후 김종필 주축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이회창‧심대평 주축의 자유선진당 등때도 사용됐다. 합의에 의한 정치를 뜻하는 '공화'라는 단어도 5번 쓰였다. 공화당, 민주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등이 예다.

사회통합이 국가적 주요 이슈로 부각됐던 1990년대 중반기부터는 지역통합적 정당명이 인기를 끌었다. 주류 보수에서 사용한 한국(신한국당), 나라(한나라당), 누리(새누리당)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당계도 국민회의(새정치국민회의)라는 통합적 요소가 담긴 당명을 썼다.

진보계열에선 '진보'나 '노동', '사회' 등의 단어가 많이 쓰였다. 진보는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청년진보당으로 이어졌다. 노동은 노동당, 민주노동당 등에 쓰였다. '정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념성향 스펙트럼의 양 끝에서 사용됐다.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에서 쓰인 이후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지만 최근 진보정당인 정의당에서 사용하고 있다.

19대~20대 국회에서의 정당명의 트랜드는 수식어로 꾸며주는 단어를 포함시키는 방식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 국민의당의 '국민의', 바른정당의 '바른'은 모두 수식 관계로 당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같은 흐름은 각 정당이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기존의 정당명은 딱딱한 이미지가 강했다. 정당명을 선정하는데 있어 대중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선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바른정당은 7000개에 가까운 당명을 공모받았다.

새누리당은 왜 이름을 안 바꿀까

정당의 이름은 철학과 이념을 담은 간판이다. 정당의 명멸이 잦은 국내 정치에서 새로운 정당이 들어설 때마다 '자유' '민주' '평화' '연대' '통합' '국민' 같은 말이 단골로 등장하는 게 이 때문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지향점이 정당의 명패에 투영된다. 정당이 추구하는 철학이 정강·정책이라면 이를 상징하는 게 당명이 된다.

150년 이상 양당제를 유지해온 미국에서 보수를 대변하는 공화당이 최악의 스캔들 '워터게이트'에 휘말리면서도 당명을 바꾸지 않은 이유 역시 여기 있다. 반대편에 있는 민주당은 남북전쟁 패배에도 불구하고 200년 이상 같은 이름을 지켰다.

2000년대 들어 당명을 정할 때 광고·브랜드·마케팅 전문가가 총동원되는 게 트렌드가 됐다. 정당의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유권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인상적인 간판을 고르기 위한 고민의 결과다. 20대 국회 4개 교섭단체 모두의 정당명이 내로라하는 광고 전문가의 손을 거쳤다.

새누리당의 당명은 '침대는 과학'이란 카피로 유명한 홍보전문가 조동원씨의 작품이다. 조씨는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영입돼 홍보본부장을 지내면서 당명 개정을 주도했다.

2015년 말 더불어민주당이 당명을 정할 때는 '처음처럼' '참이슬' '딤채' '트롬' '엔제리너스'로 유명한 브랜드 전문가 손혜원 전 홍익대 교수가 아이디어를 보탰다. 손 전 교수는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고 여전히 당내 홍보기획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민의당은 지난해 초 창당 당시 새누리당 조동원 본부장과 민주당 손혜원 홍보위원장에 맞설 상대로 이상민 브랜드앤컴퍼드 대표를 영입했다. 새해 들어 당명을 확정한 새누리당 비박계(비박근혜계) 신당 바른정당의 당명에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현대증권의 '바이코리아' 광고를 만든 홍보 전문가 홍종화씨의 기획력이 담겼다.

대한민국 정당사 70년사에서 신당의 출현은 새로운 가치를 담은 새 인물들의 등장보다는 당명 개정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문패를 바꿔 부정적 이미지를 털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취지의 신당이 대다수다.

월스트리저널은 새누리당이 등장했을 때 "당명 개정이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인기를 잃은 정당이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명 개정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역풍을 우려해 당명에 손을 못 대는 경우도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곤욕을 치르는 새누리당이 그렇다. 정진석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는 지난해 11월 당명 개정론이 확산되자 "당명을 바꾸는 작업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닌 특정 인물에 대한 '충성' 이미지가 당명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친박근혜계 의원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자 서청원 의원 등이 '친박후보들의 모임'인 친박연대를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고 금배지 14명을 당선시켰다. 정책과 이념으로 사람을 모으는 영미권 정당과 달리 명망가나 지역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해온 국내 정당사의 취약한 기반이 드러난 지점이다.


美 민주당 187년 獨 기민당 72년, 선진국 100년 당명 수두룩


정치선진국엔 50년, 길게는 200년을 바라보는 정당도 수두룩하다. 미국 양대정당인 민주·공화당은 각각 160~180년에 이른다. 영국, 독일의 현재 집권당도 최소 70년에서 길게는 180년간 존속했다. 정당의 수명이 지나치게 짧고, 존속하더라도 이름을 수시로 바꾸는 한국과 대조된다.

미국 정당은 그 역사가 오래다보니 명칭이 어지러울 정도다. 민주당, 공화당 모두 그 뿌리는 1790년대 반연방파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한 공화주의자당(Republican Party) 즉 공화당이다. 당명은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으로 점차 바뀌었다. 1820년대 앤드류 잭슨을 중심으로 친잭슨-반잭슨파로 나뉘었다. 잭슨이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분열은 가속했다. 반잭슨파가 탈당해 휘그당을 만들고 친잭슨파는 당에 남아 이름을 민주당으로 바꾼다. 이 때가 1830년이다. 1828년을 민주당 탄생 시기로 보기도 한다.

반잭슨파와 연방주의자들이 미국 남부를 거점으로 삼은 휘그당은 노예제 등에 대한 입장차로 다시 분열, 1854년 공화당이 탄생한다. 공화당은 민주당보다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이 또한 163년 전이다. 민주·공화 양당은 이때부터 명칭 변화 없이 강대국 미국을 쌓아 올렸다. 공화당의 뿌리인 휘그당은 도태했다.

영국에선 전통적 보수당인 토리당이 1830년 보수당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 이름이 1834년 공식화됐다. 진보진영에선 1881년 사회민주동맹(SDF), 1884년 페이비언협회, 1896년 독립노동당이 각각 탄생했고 이들이 합쳐 1906년 노동당으로 개칭됐다.

독일도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집권 기독민주연합(기민당), 사회민주당 등이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독일의 현재 정당질서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했다. 기민당이 그해 창설됐다. 사민당은 그보다 역사가 깊다. 1875년 설립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그 전신으로, 1890년 사민당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른다. 현재 독일의 정당 중 최장수다.

일본도 집권 자유민주당이 전후 1955년 창당해 지금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대만(타이완)에선 중화혁명당 등이 1919년 이름을 바꾼 중국국민당이 그해부터, 토착민 중심으로 독립 성향인 민주진보당이 1986년 창당 후 각각 지금까지 명칭을 그대로 쓴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100년 정당을 호언했던 열린우리당이 5년만에(2003~2007) 해산하는 등 정당 수명이 지극히 짧다. 평화, 통일, 통합 등 온갖 수식어를 붙인 민주당이 나타났다 사라진 탓에 그냥 민주당이라고 하면 어떤 당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1995년~2006년 존속한 자유민주연합이 '무려' 12년동안 같은 당명을 써 장수정당으로 역사에 남을 정도다.

이런 사실은 한국 정당정치의 큰 약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이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현대정치 역사가 민주주의 선진국보다 짧은 탓에 유력 정치인 중심으로 흩어졌다 모이는 '인물정당' 행태가 반복됐다. 비교적 당의 지지기반을 유지해 온 새누리당도 민주자유당(노태우)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당권을 잡으며 신한국당으로, '신한국'의 그림자를 벗으려는 이회창 총재가 한나라당으로, 다시 낡은 이미지를 지우려는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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