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노위원장이 된 용접공 홍영표의 '비망록'

[the300][국회의원사용설명서 2.0]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부평을)하면 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접공' 출신이 우선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20대 국회를 통해 3선에 성공한 홍 의원에게 노동관련 정책 입안 관문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맞춘 듯 꼭 들어맞는다.

지난 7월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고용노동부 예비비 지출 승인의 건을 여야 합의가 아닌 표결 처리로 결정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정책 결정 인식 변화를 가감 없이 보여줬고, 변화된 정국 주도권 흐름을 환기시켰다는 평도 받았다.

홍영표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단어는 '친노(친 노무현 전 대통령)'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 뒷얘기를 '친노' 입장에서 기술한 '비망록(2013년)'의 저자일 만큼 계파 이미지가 짙다.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에 홍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당내 '친노' 진영이 뒷선으로 물러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분명한 이미지와 색깔은 정치인을 순차적으로 성장시키는 무기다. 홍 의원이 당내 3선 중진의 상임위원장으로 성장한 배경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용접공' 출신이면서 '친노'라는 선명성은 동시에 향후 정치 행보의 스펙트럼을 제한하는 한계가 될 수도 있다. 출신과 계파를 넘는 정치인으로서 홍 의원 자신만의 '비망록'을 적어 내려갈 시점이다. 

[키워드①-고창 과수원집 맏이]

사과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던 시절인 1957년. 홍 의원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과수원집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유년시절 꽤 유복했던 그의 집안은 학창시절로 접어들면서 가세가 점차 기울었다.

어려워진 집안 사정과 진학 문제가 맞물리면서 홍 의원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읍내에 있는 큰집에서 생활했다. 이 때가 홍 의원의 '야성'이 깨어나는 시기였다. 그는 아주 잠시지만 5·16쿠데타 이전 야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큰아버지로부터 '야당정신'을 제대로 배웠다.

다만, 가세가 기울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성적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홍 의원의 회상이다. 한 번의 입시 실패 이후 서울로 올라와 재수 끝에 어렵사리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입학 후에는 음악 감상실에서 80년대의 엄혹한 현실을 잊으려 했다고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홍 의원은 음악 감상실에서 김지하의 시(詩)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등을 접하고 더욱 현실에 몰두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많은 학생 운동가들이 그랬듯 노동현장으로 몸을 던졌다.

[키워드②-용접공과 '쓰리 스타']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한 '운동'은 현장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홍 의원의 생각이었다. 그런 일념으로 수차례 낙방 끝에 '위장취업'으로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소에 들어간 것이 1982년 초의 일이다. 스스로 노동자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홍 의원은 기능사 자격증을 따려 고시 공부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1년 여 간의 노력 끝에 1983년 3월 대우자동차 차체부 용접공으로 정식 입사했다.

홍 의원은 이듬해 12월 실시된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차체부 대의원으로 당선됐다. 임금인상의 필요성을 노조원들에게 주입하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전면파업 당시, 김우중 회장이 홍 의원을 노동자 대표로 불러 임금과 관련한 담판을 지은 일화는 유명하다.

홍 의원은 "파업이 계속되던 85년 4월21일 새벽1시쯤에 급한 전갈이 와 사장실에서 가보니 김우중 회장이 들어왔다. 몇 차례에 걸친 승강이 끝에 기본급 8% 인상과 수당을 더해 총 16.4%(그해 경총 가이드라인 5.2%) 임금인상안에 합의했다"며 "당시 파업에 대한 강경한 분위기 때문에 협상 후 김 회장은 나를 자기 차 트렁크에 싣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임금교섭은 그렇게 일단락 됐지만 나는 수배자가 됐다"고 회상했다.

홍 의원은 오래지 않아 경찰에 체포돼 2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출소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노동 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 더 체포됐다. 모두 합쳐 별이 세 개, '쓰리 스타'가 됐다.

[키워드③-개혁당, 정치입문]

강성 노동운동과 세 차례의 수감으로 더 이상 대우자동차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그는 문민정부 출범과 복직투쟁의 수혜로 1995년 1월 용접공이 아닌 사무직으로 복직을 하게 된다. 인생의 무대가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특히 6년간의 런던지사 생활을 통해 협상의 기술과 경영의 원리를 배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대우가 IMF금융위기 사태의 주범으로 전락하면서 홍 의원도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 때가 2002년 2월. 대선국면이었다. 유시민을 만났고 개혁국민정당(개혁당) 중앙당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게 된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에도 관여하며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치는 보는 것만큼 쉽지 않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제2의 고향인 인천 부평갑 출마를 준비했지만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홍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는) 역량이 부족했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느냐"며 "그 때 바로 여의도에 들어갔으면 참 모자람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찬 국무총리 하에서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홍 의원은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 지원단 부단장, 재정경제부 FTA(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본부 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2009년 치러진 인천부평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키워드④-환노위원장]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용접공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던 홍 의원은 자신 스스로를 이 시대의 용접공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6년 간 영업일을 했을 때도 영업의 소통이 용접의 연결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용접공으로, 산업 현장의 노동자로 살아온 인생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홍 의원은 정치인이 된 후에도 관련된 역할을 수행했다. 민주당 전국 노동위원장을 비롯해 국회 일자리만들기 특별위원회 위원, 두 차례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등을 역임했다. 그런 그에게 20대 국회에 들어 노동정책 입안을 책임지는 환노위의 수장이 됐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다.

홍 의원은 "환노위는 우리 사회 갈등과제가 많은 상임위"라며 "상임위원장으로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중재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 그게 또 위원장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현재 홍 의원이 상임위원장으로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정부의 '노동4법' 개정 등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개혁 문제다. 이에 대해 그는 "국회 뿐 아니라 사회전체적으로 노동법 개정 등을 둘러싼 대립이 만만치 않다. 노사관계와 노조 간 관계 모두 막혀 있지 않느냐"며 "막혀 있는 것을 뚫어야 한다. 시급한 부분부터 진전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키워드⑤-조부, 친일]


지난해 8월, 홍 의원의 벼락같은 '커밍아웃'이 한동안 정치권에 회자됐다. 조부 관련 '친일' 고백이 그것이다. 홍 의원의 할아버지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 말기 친일·반민족 행위 관련자 704명 중 한 명으로 기재돼 있다.

당시 홍 의원은 공개 편지를 통해 "평생 속죄하면서 사셨던 아버지와 국회의원이 돼 민족정기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는) 민족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친일 후손"이라며 "조부의 친일 행적에 사과드리고 평생 민족정기사업에 더욱 힘을 바치겠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행적들은 잊지 마시되, 그 후손이 어떤 길을 걷는지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홍 의원의 조부 관련 친일 고백은 물론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광복7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과 조상의 친일행적을 의심받는 정치인을 포함한 사회 지도층이 많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홍 의원의 이 같은 공개 사과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여당에서는 이듬 해 총선을 겨냥한 정략적 고백이라는 평가 절하의 시선도 있었고,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진정성을 보이라는 권고도 있었다. 그러나 홍 의원은 "유권자 판단에 맡기겠다"며 출마를 강행했고 3선에 성공했다.

[이 한 장의 사진]
이리고등학교 시절, 교련시간에 '칼빈 소총'을 들고 한껏 폼을 잡은 사진이다. 홍 의원은 그 시절 영화광이었다.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려운 현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닥터지바고'와 '러브스토리'는 몇 번씩 봤고, 새 영화가 나왔다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영화라는 꿈속을 거닐던 시절이었다고 홍 의원은 회상했다.

[대표법안]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 일부개정법률안= 일명 '정년연장법'으로 19대 국회인 2012년 8월1일 홍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에 제출됐다.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단지 권고였던 정년 60세가 의무로 바뀌어 근로자 권익에 기여했다는 평이다. '정년연장에 따른 청년 고용창출 우려'라는 이유로 정부가 지침으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요! 주의]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의 비화를 '친노' 입장에서 기술한 '비망록(2013년)'의 저자이기도 할 만큼 계파 이미지가 상당히 짙다.

대선 당시 홍 의원이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종합상황실장을 지냈기에 책의 내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쪽의 입장에서만 기술됐다는 반발이 이는 등 당시 무소속이었던 안철수 의원 측 뿐만 아니라 당 내 비주류의 반발을 불러오는 '분란'의 요인이 됐다. 이 같은 계파색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데 있어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프로필]

△1957년 전북 고창 출생 △이리고 △동국대 철학과-동국대 행정학 박사수료 △대우자동차 차체부 생산직 용접공 △대우자동차 노동자 대표 △대우자동차 영국판매법인 주재원 △개혁당 조직위원장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 △재정경제부 FTA국내대책본부 본부장 △민주당 원내대변인 △민주통합당 대표 비서실장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19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 △20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18~20대 국회의원



 
  • 법안
  • 팩트체크
  • 데스크&기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