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재벌'에 지원 펑펑…'개천서 용나는' 교육혁명은?

[the300][미래를 찾는 긴 여정-리버럴리스트의 매니페스토](19)자기실현의 교육제도


↑사진제공=진영 의원실


우리의 교육제도는 ‘혼돈’속에 놓여 있다. 한국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초중고등 학생의 면학열기에 대해 미국의 대통령조차 찬탄했다지만 이는 겉으로만 본 현상일 수 있다. 우리나라 부모만큼 자녀 교육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많은 교육비를 부담하면서도 아이들을 건전한 시민으로 키워낼 수도 없다. 바람직한 자아 형성과는 너무나 먼 곳으로 연약한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다. 고루하고 규제 일변도의 입시위주 교육이 아이들을 시험 경쟁으로 내 몰고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피교육자인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회적인 허영심과 '자식에 대한 부모 관념의 고착 현상’으로 빚어졌다.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열망과 욕구 실현보다는 장래 출세 수단으로 다가간다. 피교육자는 교육적인 가치나 의미에서 점점 더 소외되는 정신적인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불만만을 심화시킬 뿐이다. 

교육은 교육 본래의 제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학교제도와 교육과정, 특히 입시제도에 이르러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개혁적인 조치가 행해져야 할 절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얼마 전 나는 독일 하이델베르그를 방문했다. 하이델베르그는 교육도시로 유명하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스테판 헬 교수는 201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01년 노벨상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56명의 수상자가 하이델베르그 대학 또는 이 대학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대학은 어떠한가?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은 취업전문기관의 수준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생 중 70% 이상이 대학으로 진학한다. 우리나라는 2014년도 기준 25세~3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이 66%로 OECD에서 1위이다. OECD평균은 39%이고 독일은 29%로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높은 대학 진학률은 고등교육 정책의 실패를 말해주고 있다. 대학이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채 양적으로만 확대돼 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하는가?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우리 교육의 목표인 ‘홍익인간’도 지금의 교육제도로는 이룩할 수 없는 한낱 꿈이 되고 있다. 홍익인간의 뜻은 “나의 인격적 품성과 능력을 길러서 모두에게 널리 유익함을 줄 수 있는 헌신적 존재로서의 나를 이룩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육은 극심한 사회경쟁에 승리해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 버렸다. 힘든 학업의 경주를 거치고 나면 ‘본인은 없고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기’만이 남게 된다.

이런 교육제도는 교육부의 관료, 즉 ‘교피아’라는 특정 교육헤게모니 집단까지 만들었다. '교육재벌'도 군림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의 혼돈기에 간판만 걸고 학생을 모집했던 대학들이 이제는 대를 이어 가며 총장과 이사장이 되고 그 가문의 상속재산이 돼 버렸다. 이런 대학이 존재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런 대학에도 국비로 각종 지원을 제공해주고 있다.

많은 사립대학은 거대한 액수의 비축금을 갖고 있으며 건물은 화려하게 건축되고 있다. 자율은 보장하되 대학의 재정은 철저히 공개돼야 한다.

한국 교육의 기형적인 현상은 각종 입시 학원과 논술학원을 번창시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데서 볼 수 있다. 정부가 인문학을 강조하자 인문학의 상업화를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특정 이념도서까지 인문학의 시장화에 부응해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정 이념 도서에 대한 정부의 지원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교육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교육개혁을 할 것인가? 어떻게 이 어려운 난제를 풀 수 있을까? .

첫째, ‘인격적 자아실현’이 교육의 기본적인 의미가 돼야 한다. 교육이 더 이상 입신출세의 수단일 수는 없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를 덕목으로 삼았던 시절에 교육이란 나라를 이끌 관인을 길러내는 곳이었다. 물론 이것도 교육의 한 기능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부수적인 것이지 그것만을 목표로 교육의 기능이 전제될 수는 없다.

교육을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해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학습과정이 돼야 한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준비기관이 아니다. 최근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중요 지수로 정하겠다는 교육행정을 보면 우리나라 학문의 장래가 걱정스럽다.

둘째, ‘다원적-자율적 교육제도’는 교육혁명의 기본개념이다. 지금 은 국가주도의 일원적인 교육제도다. 한날 한시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똑같은 학점제에 학과목 강의 평점조차 기계적으로 매겨진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공정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제도로 어떻게 다양하고 자율적인 고등 지식인을 기를 수 있을까? 적어도 고등 지식인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원적이고 자율적인 교육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사회유동성’은 계층구조의 하층에 속하는 사람일지라도 능력에 따라 상층으로 올라서고 그 반대로 능력이 부족하면 상층에서 내려가게 되는 사회제도적인 메카니즘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유동성의 제도적인 첫 출발이 바로 대학과 같은 학교제도에서 이뤄진다. ‘가난한 수재’가 대학을 마치고 사회의 상층으로 올라설 수 있어야 한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표현이야말로 전형적인 사회유동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육이야말로 사회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제도다. 가난한 학생에 대한 신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사회의 통합도 가능하게 된다. 사회유동성이 전제될 때 비로소 사회통합도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대학 입시제도로는 사회유동성은 어려워진다. 지금의 대학입시제도는 부유층이나 상층의 자제들에게 한층 유리하다.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은 특별교육을 받고 학원이며 과외 교육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유동성을 위한 교육은 기대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 이외에도 지금의 대학입시제도는 전면적으로 고쳐야 한다. 대학입시를 위한 학습으로만 진행되는 현행 중고등학교 교과중심 교육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을 혹독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식탁에 앉을 수 있게 해야만 무너진 가정도 일어나고 올바른 인성도 키워질 수 있다.

대학원은 학문연구의 중심센터이다. 우리의 대학원은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나 특정의 자연과학이나 기계, 기술의 영역에서 세계적인 학문연구의 반열로 올라설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의 연구자들이 한국으로 몰려오게 해야 한다. 한국에 관한 학문이 세계에서 당당하게 설 수 없다면 한국은 영원히 학문적인 변방이 될 것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우리 문화와 학문’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 분야 지원에 대한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분석과 대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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