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의 선동무대로 전락하면

[the300][미래를 찾는 긴 여정-리버럴리스트의 매니페스토](12)정치발전을 넘어 국가발전으로

편집자주  |  머니투데이 the300은 정치인들의 삶에 녹아있는 정치관과 비전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고 이를 검증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나의 삶, 나의 정치'를 연재합니다. 첫 번째 필자는 국회 안전행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영 의원(새누리당)입니다
↑사진제공=진영 의원실


정치발전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민주적 가치의 발전은 우리의 불가변의 목표이다. ‘정치발전=공정한 선거=민주주의’라는 전제에서 시민이 공정한 선거에 참여하고,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정치지도자들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정치발전의 기본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발전하면 사회도 안정되고 경제도 잘 되고 사람도 편하게 잘 살게 돼 국가가 발전할까? 정치는 발전하지만 오히려 경제가 나빠지고 사회가 혼란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을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Sollen)’과 ‘그렇게 되는 것(Sein)’은 다른 것이다. 옛날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떠오른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찬양받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소란한 민중의 정치였으며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들에 의해서 빚어졌던 선동의 정치였다. 결국 민주주의의 나라 아테네는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독재체제의 스파르타에게 망하고 말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그 자체로 만능일 수 없고 그저 그렇고 그런 정치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 만일 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와 같은 선동가의 무대로 전락하면 국민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한낱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로의 운명을 안게 된다.

결국 ‘정치발전=민주주의의 실현’의 논리만으로는 국가발전으로 직결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국가 발전을 위해 올바르게 실현돼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논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이 정리돼야 한다.

‘정치발전=민주적 시민사회의 정치=경제 사회적인 번영=국가의 발전’

정치발전이 단순히 제도만의 민주주의, 즉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식의 민주주의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국민이 선거에 참여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정치 참여만을 정치발전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너무 형식적이고 한정된 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선거만으로도 좋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만일 국민이 올바른 지도자나 바람직한 정치가를 선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려서 투표한다면 그 결과는 더 좋은 더 바람직한 지도자를 선출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인물을 지도자의 자리로 올라서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의 정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계파를 나눠서 극심한 분쟁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끝내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는 상황만 보여주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정치를 정치발전으로 여길 수 있을까?

정치발전의 궁극적인 지향은 ‘바람직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바람직한 국가’란 어떤 나라인가? 먼저 국가란 무엇이며 ‘바람직한 국가’를 어떤 성격의 국가로 규정할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한다. 이 질문이야말로 정치발전에 대한 옳은 대답의 모색이다. 국가에 대한 논의가 인식의 출발점이다.

국가는 “국민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나아가 인간적인 자기실현을 이룩하면서 발전과 평화와 평등의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국민의 합의된 제도”라야 한다. 국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국민 모두의 것, 즉 ‘국민의 국가’라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안위와 일상적인 생활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가치배분이 행해져야 하며 기회 평등이 보장돼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체제 안정적인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평화를 중시하고 △공정한 배분이 합리적으로 보장돼 갈등을 최소화하며 △개개인의 다양한 자기실현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인간주의적 성격을 구현하면서 △능력과 노력에 따라 사회적 유동성이 보장되는 사회체제일 때 비로소 ‘국민의 국가’가 될 수 있다.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지배나 특정 세력만이 주도하는 국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국가라야 정치발전의 본질적 의미도 이룩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모습을 이뤄가야만 정치발전의 의미도 국가발전으로 귀착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윌리엄 윌버포스가 꿈꾸던 ‘더 좋은 세상’을 지금 생각해 본다면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첫째 내가 바라는 나라는 ‘공공성을 지키면서 조용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나라다. 이는 ‘예의 바름, 즉 공공성이 확립된 사회’를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경제적인 풍요를 위해서 사람다움도 잃어버린 채 허겁지겁 돈 버는 일에만 매달려왔다. 17세기 이전의 사회, 근대적인 산업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농촌사회에서는 다 함께 연대하는 인간관계가 이뤄졌다.

북서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바탕이 됐고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는 불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근검절약하는 성실성을 일상의 기본으로 삼았다. 부지런히 일한 대가로 저축도 하고 가정과 마을이 함께 빈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협력적인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의 굴뚝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에도 높은 담장이 쳐졌다. 진실한 인간관계도 점차 단절됐다. 그 대신 각기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른바 이익사회로 변모됐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돈 벌이’를 위해서라면 무한대의 경쟁을 펼치기도 한다. 탐욕이 주도하는 반문명적인 상황이 지배하는 사회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당한 일상성에서 벗어나 끝없는 문명적 일탈로 치닫게 됐다. 우리의 마음에서 공공성이 사라져 갔다.

둘째로 ‘다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모두가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힘없는 사람들은 기가 죽어 지내거나 조그만 것이라도 쟁취해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손잡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고액 과외를 받아야만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나라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대대로 부와 권세를 점유하는 사회는 좋은 세상이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유동성이 확보된 사회라야 지키고 싶은 세상일 수 있다.

노숙자 문제는 우리 사회에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구걸하는 사람의 아픈 모습을 곳곳에서 봐야만 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내버려둔 이 사회에서 국가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 이상 더 큰 비극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을 먹는 것이고 잠을 자는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이나 노숙자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사각지대를 눈으로 확인케 한다. 제도의 잘못인가? 우리에게 능력이 없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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