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군대에서 갓 제대한 첫째 아들은 복학을 준비 중이다. 어릴 적부터 유독 똑똑했던 딸아이는 지난 가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아직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늦둥이 막내는 내년이면 고3. 국내 한 IT대기업의 자회사에서 근무하는 김모씨(53)는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다.

갖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서울 서쪽에 위치한 대형 평수 아파트 달랑 한 채. 그나마도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은행대출은 여전히 '억' 소리 나게 남아있다. 그나마 매달 찍히는 월급이 있기에 그럭저럭 살아갈만 하다.

하지만 지난 봄 회사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또래 동료 가운데 상당수가 짐을 쌌다.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다시 모기업발 사업구조 개편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김씨는 2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한 연륜을 통해 직감하고 있다. 다음에는 자신이 짐을 쌀 차례라는 것을…

#대기업 만년 부장인 박모씨(54). 내년 인사에서 임원 승진이 유력하다. 주변에서는 미리 축하한다며 한턱 낼 것을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 부장은 역설적이게도 승진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임원은 새롭게 고용계약을 해야 한다. 1~3년 정도의 고용이 보장되지만 그 이후 임원의 상당수가 옷을 벗는다. 회사에서 만년 부장들을 물갈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계약직 임원 인사를 크게 낼 것이라는 풍문 역시 들려온다. 설령 임원이 된다고 해도 계약직일 가능성이 높다.

2년 전 계약직 임원으로 승진했던 입사동기는 이번에 옷을 벗는다. 임원 승진 이후 실질급여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저녁 술자리에서 동기의 한탄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의 소박한 꿈은 정년을 채우는 것. 임원도 바라지 않는다. 지난해 회사에서 정년을 60세까지 늘린 만큼 아직 6년이 남았다. 하지만 이를 채우는 것은 '대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이 되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박 부장은 잘 알고 있다.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 중인 황 모 씨(57)는 건실한 중견 제조기업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만 57세가 되면서 결국 정년퇴직했다. 2016년부터 시행되는 '정년 60세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는 기존 사규인 '정년 57세' 규정을 적용했다.

다른 직장을 알아봤지만 재취업 전선에는 40대의 능력 있고 젊은 인력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자신처럼 나이가 많은 근로자를 원하는 회사도 없거니와 설령 자리가 나도 대기업 출신의 스펙과 연줄 좋은 경쟁자들에게 밀렸다.

어렵사리 아파트 경비직을 시작한 것도 운이 좋았다. 면접 자리에서 관리사무소 소장은 "나이가 많은 경비는 체력이 부족해서 주민들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아서 회사에서 나와야만 했던 황 씨는 역설적이게도 상대적으로 젊은 덕에 경비원 취직이 가능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지난해 5월 국회에서 통과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정년연장법) 시행 1년여를 앞두고 근로자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 법은 정년 60세 연장 및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주요내용으로 담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근로자들에게는 이 같은 정년연장이 '그림의 떡'이어서 다수 근로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정년 60세법' 시행으로 가장 큰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정년연장법 통과 이전에 57세 정년을 맞는 '낀세대'다. 일부 대기업들은 2016년 법 시행에 앞서 정년을 미리 연장해 이들에 대한 규제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업장에서는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년연장법 시행으로 인건비 증가 우려가 앞서는 중견기업이 상당수다. 300인 이하 중소기업 역시 2017년부터는 정년을 연장해야 하지만 재원마련 등 뚜렷한 대책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정년연장법 이후 고령 근로자들을 고용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서둘러 50대 중후반 인사들에 대한 명예퇴직을 고려하는 사업주들도 상당수다.

정년연장법을 위한 준비기간이 짧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은 1994년 60세 정년 연장법을 통과시켰지만 시행은 4년 후인 1998년에 시작했다. 특히 법 시행 이후 정부와 기업들의 협력을 통해 법안 통과 직후 근로자 30명 이상 사업장의 84.1%가 정년을 연장했다. 법 시행 직전에는 93.3%가 정년을 연장했다. 1967년 '고용대책 기본계획'을 통해 60세 정년제를 처음 검토한 이후 30년 동안 사회적 합의와 고민을 한 결과다. 하지만 한국은 그 고민이 너무 늦었다.

아울러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에게 정년연장 혜택이 돌아갈지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

지난 9월 한국노동연구원이 1000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만 60세 정년시대 현실성을 묻는 질문에 "지켜질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38%에 불과했다.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33%, '중립'은 29%로 60% 이상이 정년 보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노조의 힘이 약한 사무직 노동자들은 더더욱 정년 보장이 쉽지 않다. 지난 6월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사무직들이 개인 직업력을 대표할 수 있는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연령은 평균 53세에 불과하다. 고용노동부가 300명 이상 사업장 퇴직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정년을 채운 노동자는 10.7%에 불과했다.

40~50대에 정년퇴직을 한다는 '사오정', 50~60대에 회사를 다니면 도둑놈이라는 '오륙도'라는 신조어가 새롭지 않은 현실이다. 현행 57세인 정년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법으로 정년을 연장한다 해도 고령자에 대한 일자리 보장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다.

정년 60세 연장이 고령자의 생계보호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따져봐야 할 문제다. 도움이 되는지 여부도 관건이다. 국민연금 지급시기가 60세에서 65세로 늘어난 만큼 정년연장 이후에도 여전히 5년의 수입 공백기가 생긴다.

특히 주요 국가에 비해 정년시기도 빠르다. 독일과 덴마크는 67세까지 정년을 늘리기로 했다. 이웃인 일본 역시 최근 정년을 65세로 늘리기로 했다. 싱가포르와 대만은 각각 63세, 62세다. 프랑스 역시 2018년부터 정년을 기존 60세에서 62세로 늘리기로 했다. 특히 이들 국가는 정년에 맞춰 연금지금 시기를 조정해 수입 공백을 최소화하고 있다. 한국처럼 장시간 공백을 갖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년보장으로 인해 기업들의 임금부담이 높아지는 것 역시 풀어야할 숙제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현행 임금체계를 조정하지 않고, 정년 60세가 의무화되면 향후 인건비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67.3%에 달한다.

때문에 정년 연장과 함께 연계돼야 하는 제도가 임금피크제다. 정년을 앞두고 임금이 줄어들게 해 기업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이다.